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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내일 - 1차세계대전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아이들의 전쟁 일기
즐라타 필리포빅 지음, 멜라니 첼린저 엮음, 정미영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헤겔은 행복한 국민들에겐 역사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폭력이 역사의 원동력이며 역사에는 방향이 없다고도 말했다. 어쨌거나 너무 거칠었다. 좀 더 섬세하고 정교하고 부드러웠다면 좋았을 텐데 역사 속엔 상처가 너무 많고 아직도 상처내기가 계속되는 중이다. 요즘 우리 국민 중에도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고,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건 우리가 행복한 국민이 되지 못한다는 뜻인 것 같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지만, 역사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상처는 전쟁이 아닐까.
전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게 뭘까. 운이 좋아 아직 한 번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덕분에 나에게 전쟁은 역사책에 기록된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보는 전쟁은 그저 하나의 픽션이었고, 다큐멘터리나 신문기사 등을 통해 보는 전쟁도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렇게 구체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들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거랑 내가 한 대 얻어맞는 거랑은 느낌이 천지차이인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역사 속에 기록된 전쟁은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구경, 아니 강 건너 불구경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게 별로 없다.
<안네의 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경험담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린이의 눈과 감성을 통해 전달되는 전쟁의 모습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하게 느껴지고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이 책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소녀 피테 쿠르, 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에 살다가 창이수용소에 수감되는 실라 알란과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피해 지하실에 2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던 유태인 소녀 클라라 슈왈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에드 블랑코, 보스니아 전쟁을 겪은 즐라타 필리포빅,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소녀 시란 젤리코비치와 팔레스타인 소녀 메리 헤즈보운, 이라크 전쟁과 폭탄테러에 대한 공포로 혼란을 겪는 소년 호다 타키르 제하드, 이렇게 8명의 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기를 쓰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도 어디에선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폭격과 총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기장을 펼치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물과 전기가 끊어진 상황에서 물 두 컵으로 몸을 씻고 그 물에 빨래를 하거나 동상에 걸려 퉁퉁 붓고 가려운 손과 발 때문에 고생하거나, 배고픔에 시달리다 벌레를 잡아 입에 넣거나, 죽은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그저 학교에 가고 마음껏 뛰어노는 게 소원인 그런 아이들 말이다. 전쟁에게 빼앗긴 이 아이들의 그 시간들을 우리는 다시 돌려줄 방법이 없다.
이런 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게 하고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자칫 싸구려 동정심에 빠져버리거나 감상에 젖어 꿈에나 있을 법한 평화를 꿈꾸게 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책으로 우리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처지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은 너무 뻔뻔한 것 같아 더더구나 못하겠다. 그건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 내 행복을 확인하는,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는 ‘개선의 여지’에 눈감고 적당히 만족하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난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에서 인용한 말처럼 누군가는 폭력이 역사의 원동력이며 역사에는 방향이 없다고 했지만 또 누군가는 과거를 기억하면 역사를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건을 명철하게 기록할 수 있고, 또한 사람들이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요약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역사는 현실의 무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며 그 안에 여러분의 역할도 있다고.
그러나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잠시 고민을 한다. 경쟁을 교육의 수단으로 삼는 이 나라에서 지금 우리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돕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을 싸움판에 내보낼 한 마리 투견으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아이들에게 권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위선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스스럼없이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