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 박영수의 생생 우리 역사 시리즈 3
박영수 지음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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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국사나 세계사 같은 역사 과목들은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에 따라 아주 재미있거나 아주 따분해지곤 했다. 중학생 시절의 선생님이 한 분 떠올랐다. 세계사를 맡았던 중년의 아줌마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중간 중간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숨죽이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선생님 덕에 세계사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적어도 그 선생님이 세계사를 가르치셨던 동안은.

이 책이 꼭 그 선생님을 닮았다. 역사는 죽은 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야망을 불태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빨리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삼국시대나 신라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의 느낌이 들어서 매력적이고 조선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가까워서 기록이며 유물이 풍성한 편인데다가 자주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려는? 왠지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지은이도 이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머리말에서 ‘....고려시대는 상대적으로 친밀도가 떨어져서 재미없다고 속단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오해나 편견에서 나온 판단이며 고려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고려 초기, 고려 중기, 고려 말기의 세 장으로 구분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무려 37가지다. 고려 건국 전, 왕건이 궁예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 주변의 모함으로 위기에 처한 왕건을 기지를 발휘해서 구한 최응의 이야기를 첫 번째로 해서 청렴하고 강직했던 3대정승 서필, 서희, 서눌의 이야기, 8대 현종 때의 강감찬의 탄생부터 거란과의 전쟁에서의 용맹함으로 강감찬이 무속신으로 추앙받게 된 사연이 이어진다. 특히 17대 인종 때의 이자겸과 묘청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이자겸이 왕비가 된 넷째 딸을 이용해서 인종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계획이 실패하는 이야기나 서경천도를 꿈꾸었던 묘청이 뜨거운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만들어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에 기름에 새어나와 오색무지개 무늬가 강물위에 둥둥 뜨게 만들고는 ‘용의 침’이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신중한 인종에게 딱 걸리는 이야기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 무신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이야기로 문을 여는데, 이 사건은 19대 명종 제위시절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노비출신이나 힘도 세고 출세욕도 강해서 장군자리에 올라 권력을 쥐었지만 최충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의민, 23대 고종 시절 실권을 쥐었던 최우의 사위로 다음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장인의 여인들과 잘못 어울렸다가 아내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한 김약선, 호적조차 없었던 천민중의 천민 양수척 출신의 미인 자운선의 불행, 뛰어난 문장가 이규보, 그리고 몽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충’자 돌림의 왕들의 이야기는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격랑의 시대를 드러낸다.

고려말기는 31대 공민왕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공민왕이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슬퍼하자 승려 신돈이 노국대장공주를 닮은 여종 반야를 공민왕에게 소개해 그 사이에서 32대왕인 우왕이 탄생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같은 여자로서 노국대장공주도 반야도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문익점의 목화씨 밀반입에 대한 진실과 목화재배와 보급을 위해 각고의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던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용맹하고 후덕했던 장수 최운해가 마누라가 무서워 달아난 사연,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던 청렴한 최영 장군 집의 음식의 맛의 비결은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패망을 맞은 고려.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며 만수산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어도 나오지 않았다는 72명의 충신 두문72현,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선죽교 죽음으로 책은 끝을 맺는다.

물론 정치적인 일화 외에도 내기 바둑에는 능했으나 겁이 많아 낭패를 본 홍순의 이야기라든가 ‘벼락 맞은 집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일어난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 이야기, 형제투금 설화에 얽힌 여러 가지 주장들,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손변, 왕비와 후궁들 간의 골치 아픈 질투 싸움에서 받은 상처를 동성애로 위로받았던 왕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씨소녀의 이야기 등도 이어진다.

이야기 끝마다 실려 있는 ‘문화이야기’라는 팁도 읽어볼만 하다. 정자가 모두 팔각정인 이유, 조기를 ‘굴비’라고도 부르게 된 데 얽힌 사연,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행운의 상징인 까닭, 옥새의 유래 등등을 아이들에게 슬쩍 이야기해주자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야사나 일화는 자칫하면 역사의 큰 줄기를 놓치고 말초적인 흥미 중심의 이야기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역사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중학생 때의 그 세계사 선생님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돌 위에 새겨진 듯했던 역사에 피가 돌고 온기가 퍼지고 사르르 결을 세워 감동의 질감이 드러나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말이다.  마치 갓 구워 따끈한 페스츄리의 냄새와 그 결을 느끼며 맛을 만끽하는 기분이랄까.

이야기에서 좀 더 힘을 뺐다면 더 재미나고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글이 ‘이야기’ 로서 자족하지 않고 역사가 주는 교훈이나 학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희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담판 이야기에서 “서희가 소손녕을 설득한 비결은 뭘까?”하며 갑자기 지은이가 독자에게 ‘가르치기’를 시도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고려사에 대한 흥미에 비하면 이는 사소한 결점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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