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국회의원들이란 다만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정당에 물질적 이익이 많이 돌아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일에는 도대체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윤을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일반의 복지를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격돌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잉크병을 던지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237)

나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문제를 여러 가지를 새로운 형태로 설정해 보았다. 만약 자기 집에서 가족 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전염병의 감염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집을 떠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희망은 없을지라도 그 병자를 끝까지 간호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 도대체 하나의 혁명을 질병과 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도덕적인 규준을 뒤엎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안이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플랑크가 이야기한 타협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강의가 시작될 때마다 나치당이 요구하는 형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는 손을 높이 들어야 했는데(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서 히틀러 만세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 당시의 형식이었다-역주),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그들의 요구대로 사람을 만났을 때 손을 들고 그 손끝을 움직이면서 인사를 하였던가. 이런 행동이야말로 하나의 수치스러운 타협이 아니었던가? 공식적인 편지에는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라고 서명해야만 했는데, 이거야말로 불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238)

한편 사람들이 이민을 결심하였다면, “사람은 일반적인 최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원칙에 맞도록 자기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칸트의 요구와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모든 사람이 이민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때그때의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쉴 새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것일까. 비록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갔다 해서-긴 안목으로 생각할 때- 그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재난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사람이란 출생과 언어, 그리고 교육으로 말미암아 어느 특정한 나라에 소속되게 마련이다. 이민을 간다는 것은 결국 정신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독일을 도저히 장래를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파국으로 몰고 가려는 광신적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투쟁도 없이 넘겨주는 격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240)

실제로는 내가 이민을 갈 것인가, 독일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플랑크는 이와 같은 파국이 지나간 다음의 시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분명하게 잘 이해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재난의 시기를 통하여 불변의 고도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젊은이들을 모으는 일, 그래서 되도록 이 재난을 꿋꿋하게 타개해 나가다가 재난이 끝나면 다시 새롭게 재건하는 일이 플랑크가 나에게 말한 과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협을 맺게도 되고, 이로 말미암아 뒷날 지탄을 받게 될 경우도 생길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더 악화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설정된 과제였다. 원래가 국외에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좀더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과제가 있을 뿐이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왔을 때는 적어도 당분간은 독일에, 그리고 라이프치히대학에 머물면서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지켜보기로 한 결심이 차츰 굳어지고 있었다.

(253)

어째서 그런 세 개의 임의적인 단위가 존재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그 단위 가운데 하나-양성자-는 다른 단위-전자-보다 1836배의 무게를 가져야 하는지, 도대체 이 1836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또 이 숫자는 왜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단위들을 임의의 높은 에너지로써 서로 충돌시킬 수 있게 되었다.

(270)

어쨌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원자탄의 발명으로 결판이 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젊은이들의 몽상적인 희망과 일부 연장자계층의 사악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불합리한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원자폭탄의 힘에 따른 결정은 자각이나 피폐에 따른 결정보다는 문제해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전쟁이 끝나면 다음 시대는 원자기술이나 다른 기술의 진보로 특정지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겠습니다.

(286-287)

그러나 우리 독일사람들이 저 이상한 꿈과 신비를 향해 달음질치는 경향을 계산에 넣는다 하더라도, 어째서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분명하게 냉철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그렇게까지 환멸을 느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논리적인 사고와 단단히 짜여진 자연법칙들의 이해와 적용만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않습니다. 도리어 실질적인 면에서는 환상은 과학의 영역, 특히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얻기 위하여 냉철하고 세심한 많은 실험적인 작업이 필요하지만 사실의 종합정리는 사람들이 그 현상을 곰곰이 생각할 때보다는 도리어 그 현상으로 감정이입이 가능할 때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88)

우리는 우리 눈앞에 주어진 사실만을 걱정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장래의 일은 현실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는 상상을 통해서 생각해야 하며, 전후에 독일민족에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생활조건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정치가 탄생될 것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과학에 관한 카이저-빌헬름 연구협회는 독일에서 연구활동의 재건을 위해서 꽤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학들은 카이저-빌헬름 연구협회에 견주면 정치적인 간섭을 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대학들은 좀더 큰 어려움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연구협회가 전쟁 중에 무기개발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 있는 많은 학자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그리고 저마다 자기 나라에서 냉철하고 신중한 사고의 의의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되도록 우리를 도와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전문 분야에서 전후의 평화적이고 국제적인 협동연구를 위한 어떤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298-299)

과학의 발달이 이와 같은 재난과 연결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과학의 발달과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상의 소유자들도 당연히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자연과학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학문적 정치적인 과제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점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의 생활이 광범위하세 과학의 발전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곧 지식의 끊임없는 확장에서 전향해 버린다면 지구상의 인구를 단시일 안에 급격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마도 원자폭탄과 필적하거나 그보다 더 흉악한 파탄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지식은 힘입니다. 지상에서 힘을 얻으려는 싸움이 존속하는 한 그리고 당분간은 이 싸움이 종식될 것 같이 않는데 지식을 위한 싸움도 계속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훨씬 뒤에 가서 하나의 세계정부와 같은, 말하자면 단일 중심적이긴 하지만 되도록 자유가 유지되면서 지구상의 상호질서가 지켜지는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지식의 확대에 대한 노력은 약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분간은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생활과정에 속할 것이고,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전히 이 발전과정을 선한 방향으로 돌리고 지식의 확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만 이용하여야 하되, 그러면서도 이 발전 자체는 방해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개개인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또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일까.

(302)

아마도 전쟁 초기에 미국 물리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의 제조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을 몹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라늄 분열은 한에 의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히틀러가 유능한 많은 물리학자들을 추방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원자물리학의 수준이 확실히 그들보다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따라서 그들은 원자폭탄에 따른 히틀러의 승리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도 자기들의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면, 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무어라고 반론을 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일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마도 미국의 많은 물리학들은 이 무기의 사용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겠지만, 그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늦었을 거라고 본다. 이 점에 관해서도 우리는 무어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 정부가 저지른 무서운 일들을 조금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전도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변명도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좀더 노력하였더라면 그것을 좀더 확실하게 알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체적인 사고과정에서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에서 선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될 수 있으나 악을 위해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대원칙, 좀더 나쁘게 말한다면,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한다는 이 원칙이 항상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과정을 막을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307)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가 일반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중요성에 비추어 그 진보를 직접 담당하는 자들의 공적인 영향력도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물리학자나 기술자가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을 정치가보다 더 잘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인 연구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특히 커다란 연관성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기를 배운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가들의 직업에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논리적인 정확성과 넓은 시야, 그리고 엄격한 청렴 등의 건설적인 요소들은 부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미국의 원자물리학자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즉 원자폭탄 사용의 결정권을 너무 손쉽게 손에서 놓아 버렸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자탄 투하의 역효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320)

지금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양자이론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이란 한편에서는 실험과 측정으로, 다른 한 편에서는 수학적인 공식체계에 따라서 성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순순한 철학 사이의 접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즉 이 같은 실험과 수학 사이의 작용에서 일어나는 본래적인 것을 일반적인 언어로 설명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저 또한 양자이론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증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넘기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정확한 개념들을 쓸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사실상 자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가지고서 그들의 실험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딜레마이며, 이것을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323)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전문가란 그가 관계하는 분야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정의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한 사람이 한 분야에 관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알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전문가란 그가 전문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몇몇의 오류를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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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설연휴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우아하고 호쾌한 시간 되세요 ㅎㅎㅎㅎ

bookholic 2019-02-02 08:09   좋아요 1 | URL
때마다 인사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도 즐겁고 여유로운 설명절이 되시길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 한 해도 알라딘에서 주옥같은 글들 부탁드립니다...
 

부산 여행 왔다가
알라딘 부산 센텀점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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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너희처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너무나 쉽게 경험적 사실에 의지해 버리고, 또 그것으로 진리를 얻었다고 믿어 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험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고찰한다면 너희들이 갖는 방식은 나에게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요컨대 너희들이 사고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며, 너희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물론 사물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을 직접 인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먼저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개념을 형성해야 한다. 감성적인 인지를 통해 인지로부터 우리에게 몰려드는 것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인상들의 무질서한 혼합물이다. 우리가 나중에 인지한 형태나 성질들은 직접적으로는 그 인상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36~37)

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쉽게 미래를 쉽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이 어느 영역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영역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음악의 경우, 최근의 작곡가들은 옛날의 작곡가에 견주어 충분히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17세기의 음악은 그 당시의 음악에서는 개개인의 감정세계로 이행이 이루어졌고, 낭만주의적인 19세기의 음악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음악은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짙으며 도리어 허약한 실험단계에 빠진 것같이 느껴집니다. 이 단계에서 이미 정해진 궤도에 따라서 전전하려는 확실한 의식보다는 이론적인 고찰이 더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설정된 궤도의 추구-20년 전까지만 해도 그 목표는 전자기적 현상의 이해였음에 틀림없었지만-는 저절로 공간과 시간의 구조라든가, 인과법칙의 타당성과 같은 철학적인 근본적 위치가 문제되는 그러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앞조차 뚜렷이 내다볼 수 없는 신천지가 열렸으며, 따라서 뚜렷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내가 무엇인가 공동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40)

예를 들면 물이라는 액체는 얼음이 녹는다든지 수증기가 액화할 때, 또는 수소가 연소할 때도 항상 그 모든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똑 같은 것이 새롭게 형성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항상 전제되어 왔으나 한 번도 이해되어 본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화학은 이 개념을 효과 있게 사용해 왔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뉴턴의 운동법칙을 가지고는 그 같은 물질의 최소부분의 운동의 안전도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원자들이 항상 반복하여 같은 상태로 배열되고 운동하고, 그 결과 동일한 안정된 특성을 가진 원소들이 반복해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자연법칙에 관해서는 20년 전에 발표된 플랑크의 양자론에서 최초로 시사된 바 있다.

(56~57)

그러나 볼프강은 이 같은 견해를 지나치게 실증주의 일변도로 흐를 주장으로 보았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뉴턴의 천문학은 원칙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뉴턴은 문제 설정에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는 운동을 주된 문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먼저 운동의 원인을 문제삼았다. 그는 그 원인을 힘에서 찾았고, 행성계에서는 힘이 운동보다 간단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것을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뉴턴 이후에 행성의 운동을 이해하였다고 한다면 정확한 관측에 따른 행성의 매우 복잡한 운동을 대단히 간단한 것, 즉 중력에 귀착시킴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사람들은 그 복잡한 것을 원과 주전원의 중첩을 통하여 서술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경험적 사실을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다. 뉴턴은 그 밖에도 행성의 운동에도 던져진 돌의 운동, 진자의 진동, 또는 팽이의 춤 등에서와 같은 운동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뉴턴의 역학에서는 이 같은 일련의 상이한 현상들을 동일한 바탕 위에, 질량x가속도=이라는 유명한 공식에 귀착시킬 수가 있었던 데서 행성계에 관한 뉴턴의 설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설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88)

보어는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바로 이 성에 햄릿이 살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성이 달리 보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견지에서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 성이 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또한 건축가가 쌓아올린 그 형식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돌들과 녹이 슬어 있는 녹색 지붕의 교회 안에 있는 부조(浮彫), 이것들이 바로 이 성입니다. 햄릿이 여기서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도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도 이 성은 완전히 다른 성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갑자기 이 성의 담과 돌벽은 우리에게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성의 안뜰이 전세계로 바뀌고 어두운 구석은 인간 영혼의 어두움을 상기시키고,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라는 저 유명한 물음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햄릿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13세기 연대기의 짧은 주석 안에 햄릿이란 이름이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가 실제로 생존했던 인물인지, 그가 여기사 살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이 인물과 어떠한 문제를 결부시켰는지, 그리고 그때 인간 영혼의 어느 깊은 곳을 비추어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물은 이 지상에서 한 장소가 필요했으며, 바로 그 장소로 이 크론보르크성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이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 성은 바로 다른 성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94)

나는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전주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상당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확률적 예상을 뒤엎고 나는 단 한 번으로 그 전주에 맞혔다. 보어는 아주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팔을 움직여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돌 던지기를 시도할 때는 적중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 모든 이성을 무시하고 혹시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단순한 생각 아래 던지면 사정은 좀 달라집니다. 지금 바로 그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108)

현재까지 우리들은 어떠한 언어로 원자 안의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수학적 언어, 즉 수학적 도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자의 정상상태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이 언어가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와 일반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자의 정상상태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이 언어가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와 일반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론을 실험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이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험결과에 관해서는 아직도 항상 일반적인 언어, 즉 고전물리학에서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였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수학적인 도식은 이미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언어와 맺는 연관성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것이 형성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안개상자 안의 전자 궤도에 대해서도 아무런 내부모순이 없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난점을 해결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116)

과학의 진보는 그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그러나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받아들일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적인 한 발짝을 내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라이프치히의 자연과학자대회에서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론에서도 본질적으로 어려운 고비가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127~128)

닐스 보어가 노르웨이에서 스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어려운 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자기 생각을 계속 추구하면서 파동상과 입자상의 이중성을 해석의 바탕으로 삼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고찰의 중심에는 그가 이번에 새롭게 고안해낸 상보성원리가 있었다. 이 원리를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의 다른 관찰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이 두 관찰방식은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서로 보충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관찰방식을 병행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현상의 직관적 내용이 완전히 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불확정성 관계도 상보성원리의 일반적인 상황 가운데 어떤 특수한 경우라고 느꼈던 모양이고, 따라서 그는 불확정성 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유보조건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코펜하겐에서 일하고 있던 스웨덴의 물리학자 오스카 클라인의 도움으로, 둘은 쌍방의 해석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이해된 사실을 그것이 비록 새로운 사실일지라도 일반 물리학자들에게 공개할 때 그것이 이해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였다.

(186~187)

우리들은 전자가 어느 방향에서 방출될 것인가를 알지 못 한다고 확인하였습니다. 당신으로 그러니까 이 방향 결정요소를 계속하여 찾아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결정요소를 찾았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어려운 고비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방출된 전자는 또한 원자핵으로부터 방사되는 물질파로써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파동은 간섭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원자핵에서 반대방향으로 방사된 파동 부분은 그것에 맞추어 설치해 놓은 장치 안에서 간섭현상을 일으켜 그 장치의 결과로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의 파동은 소멸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전자가 이 방향으로는 결국 방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언할 수 있음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새로운 결정요소를 알고, 전자가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방출된다는 것이 완전히 결론지어졌다면 간섭현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간섭에 따른 소멸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끌어낸 결론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멸현상은 실험적으로 관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결정요소는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더 이상의 새로운 결정요소가 없이도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3~194)

칸트는 그의 선천적인 것으로써 당시 자연과학의 인식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했지만 오늘의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는 새로운 인식론적 상황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의 법칙이 당시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중요한 실제적 규칙성의 정확한 정식화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오늘의 기술, 말하자면 전자기술에서는 이 법칙은 이미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은 불확실한 의견이 아니라 참지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레에 관해서 말해지는 한에서는 어떤 시대에도 통용될 것이며, 저 멀리 어딘가 있는 다른 성원계의 행성에도 지레가 존재한다면 거기서도 아르키메데스의 주장은 옳을 것입니다. 인류가 자기 지식의 학장과 더불어 지레의 개념만을 가지고는 이미 충분치 않은 기술의 영역에 돌입한다고 하는 진술의 제2부분은 본디 지레의 법칙이 역사적인 발전과정에서 더 포괄적인 기술체계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그 법칙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중심적 의의가 그 뒤로는 이미 통용될 수가 없게 되었음을 뜻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가 한 인식의 분석은 단순히 불확실한 의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참지식이며, 반응할 수 있는 생물이 그 외부세계에 대하여, 우리들 인간의 처지에서는 경험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관계에 서게 될 때에는 칸트의 철학은 어디에서나 정당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천적인 것도 뒷날 그 중심적 지위에서 추방되고 인식과정의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의 일부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연과학적인 또는 철학적인 지식이 어느 시대에도 그 본래적인 진리를 갖는다는 명제로서 완화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구조도 바뀐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과학의 진보란 다만 단순히 우리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거듭 새롭게 배워나감으로써 성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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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우리집 십대소녀께서

편지라면서 종이 하나를 건넸는데...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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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1-26 0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롱다리 머큐리네요^^:)

syo 2019-01-26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오....

카알벨루치 2019-01-26 09:25   좋아요 1 | URL
에오2

bookholic 2019-01-26 09:58   좋아요 1 | URL
˝에~~~ 오~~~~˝ 30년이 지나서 유행어가 된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님, syo님, 카알벨루치님, 모두 ˝에~~~~ 오~~~˝하는 주말 되세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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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도 축구를 좋아하는 편이야.. 아주 예전에는 조기 축구도 하고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기회도 없어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낯가림도 많아지고, 게으름도 많아지고 나서는 축구를 할 기회가 없구나. 하지만 축구 보는 것은 여전히 좋아한단다. 작년에는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때는 너희들과 함께 축구를 보고 같이 응원을 할 수 있어 좋았단다. 그런데 방금 전 아시안컵에 보다가 속 터지는지 알았단다. 국가대표 경기 말고 프로축구도 가끔 보고, 유럽축구도 즐겨본단다. 그런데, 아빠가 보는 축구는 늘 남자들이 하는 축구였단다.

여자축구를 본 적이 있나 싶어.. 이 책을 읽고 나서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여자축구 경기를 제대로 한번 관람한 적도 없으니 말이야. 우리나라에 여자프로축구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단다. 그냥 실업 축구단만 있는 줄 알았어. 그리고 그 여자프로축구는 입장료도 없다고 하더구나. 그런데도 관객은 거의 없다고 하고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여자축구의 관심이 늘었으면 하네.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에 관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제목에 떡 하니여자 축구라고 써있는 책을 왜 읽었냐고? 이 책은 먼저 읽은 이들의 극찬이 이어진 책이란다. 아빠도 축구도 좋아하니까 읽어보고 싶어서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에 읽게 된 것이란다. 김혼비라는 필명을 가진 분이 끈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책이야.

평범한 직장 여성이 아마추어 여자축구단에 가입해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글이란다.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단다. 말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은 꽤 있지만, 글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지은이의 첫 번째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썼단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렇게 킥킥 웃으면서 읽은 책이 있나 싶었단다. 비유 또한 놀랍더구나. 폴란드 학생을 소환하고 실존주의를 소환하는 실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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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튀어나온 공을 리바운드해서 골로 연결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바라 마지않았고, 하려고 노력했던툭 쳐서 주워 먹기를 드디어 성공했는데, 하필 골키퍼가 나였다. 저 시나리오에서 골키퍼도 내가 되고 주워 먹는 사람도 내가 될 수 있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반전이다. 마치 폴란드 영화 학교 2학년생이 실존주의에 대해 고민하다가 써낸 단편 영화 시나리오 같다. 살면서 내가 골을 넣는다는 것도 매우 현실성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면서 내가 자책골을 넣는다는 것은 아예 상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동시에일어났다. 축구가 진짜 이렇게 전복적인 종합 예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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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이들이 왜 극찬을 했는지 알겠더구나.

 

 

1.

여자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하면 보통 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여자들도 축구 보는 것을 많이들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로 축구 이야기가 3등이었고, 1등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라는 우스개도 있었어. 최근 들어서는 축구에 관심이 많은 여자들도 많아졌지만, 유럽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아빠 주변에 없는 것 같아.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의 여자 주인공이 바르셀로나와 유럽축구의 광팬으로 나왔던 것이 기억나는구나. 이 책의 지은이 김혼비도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호나우두에 반해서 그가 뛰었던 유럽축구에 빠졌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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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호나우두가 스텝오버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보통 헛다리를 짚을 때는 달리는 속도가 확 줄기 마련인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수비수들을 휙휙 제치고 죽죽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저게 가능한가? 물리학적으로 말이 되나? 마지막에는 골키퍼까지 스텝오버로 제치고 골을 꽂아 넣는데, 축구가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노릇인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우아한 헛다리와 그물 안으로 감겨들어 가는 공의 궤적과 관중들의 얼굴에 역력한 감동의 흔적. 어마어마한 규모의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지만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어 오랫동안 호나우두를 따라다니며 해외 축구를 찾아봤다. (새벽 중계가 대부분이어서 오랜만에 AM 김혼비가 맹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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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직접 여자가 축구를 한다? 아빠 주변에는 물론 축구 하는 여자가 없기 때문에 축구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어.  이 책은 그런 축구 하는 여자가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어. 그들이 뛴 경기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 있었던 일들까지 말이야. 그것도 극적인 반전과 순발력 있는 위트까지 가미해서 말이지때로는 콧등 찡한 감동도 주었어. 연령대도 다양하고 직업도 다양한 그녀들은 왜 축구를 하는 것일까? 여자 축구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남자 축구와 달리 섬세함이 있다면서 이번에는 트럼프 카드를 소환해서 비유했단다. 지은이는 비유의 천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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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신체 조건상 남자 축구에 비해 힘과 속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 축구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온다 남자 축구는 뭔가 휙휙 재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면, (물론 그게 또 재미지만) 여자 축구는상대적으로느리고 정적인 몸동작과 전개가 선수들과 공이 만들어 내는 축구의 전체적인 그림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패스 워크라든지, 오프더볼 상황에서의 움직이라든지, 역습 때의 호흡 같은 것들을 그때그때 섬세하게 읽어 내는 재미가 있다. 툭툭 주고받는 짧은 패스들이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호쾌한 슈팅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한 장 한 장 엇갈리게 섞인 트럼프 카드가 둥그렇게 만든 손 모양을 따라 폭포처럼 아래로 좌르륵 떨어지며 반듯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때처럼 살짝 황홀하고 근사한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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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킥킥 웃음을 참으며 책을 읽다 보면 금방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게 된단다.. 마지막에는 생각거리를 하나 던져 주었어.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남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자 축구는 그런 인식의 틈을 내고 인식의 변화를 만들었다고 했어.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가 은연중에 남자의 전유물로 여기는 많은 분야에 여자들의 도전으로 인식인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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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그러다 보면 지금은 너무나 아득해서 보이지도 않는, 축구처럼 아직까지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 끊임없이 인식의 구획에 틈을 내고 틈을 넓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침내 아무 구획도 없는 넓은 광장에서 만나는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초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렇다 인간은 모일수록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축구공 앞에서, 특히 여자들은.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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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여자 축구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단다. 그래서 여자프로축구에 대해서 검색도 해보고 그랬어. 앞으로 남자 축구뿐만 아니라 여자 축구에도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해나중에 기회가 되면 너희들과 여자프로축구를 한번 보러 가도 좋고.. 공짜라잖아..^^

 

PS:

책의 첫 문장 : “나이 먹으면서 취향이 변하는 게 맞나 봐. 난 원래 운동하는 거 질색했는데.”

책의 끝 문장 :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8)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우연찮게, 썩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룰도 제대로 모른 채 축구를 시작한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넓은 피치 위를 뛰어다니고, 공 다루는 섬세한 기술들을 하나둘씩 익혀가고, 팀원들끼리 호흡을 맞춰 골대를 향해 공을 착착 몰고 가는 재미에 푹 빠지며 ‘아, 사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운동에 대한 깊고 오랜 오해 하나가 풀렸을 뿐인데 그녀들에게 축구를 시작한 이후의 시간들은 전과 다른 시간이 되었다.

(34)

이렇게 운동 효과 면에서나 대외 이미지나 일상 활용성에서 모두 애매하디 애매한 운동이면서, 결정적으로 접근성까지 낮다. 다른 운동처럼 여기저기 배울 곳이 있고 정보가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경로로 열심히 검색해 봐야 하나씩 겨우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이 그라운드로 진입하는 것을 겹겹이 막으며 철통 수비하고 있다. 축구로 입문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축구인 것이다.

(43)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생각해 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64)

이게 다 아웃사이드 드리블 때문이다. 아웃사이드 드리블은 발 바깥쪽을 이용해서 새끼발가락이 공 밑 부분에 살짝 들어가듯 차, 공을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 드리블 최고의 장점은 수비를 속일 때 아주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쪽으로 갈 것처럼 몸을 기울여서 상대 선수가 덩달아 그쪽으로 몸이 기운 틈을 타 반대쪽으로 휙 빠져나가기 좋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라면 단연 ‘슛! 골인’이겠지만, 수비를 휙휙 제치며 빠져나가는 순간도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나를 축구로 확 끌어들인 장면도 호나우두의 골이 아니라 헛다리 짚기 아닌가! 로빙슛의 그날, 우리 주장이 보여 줬던 현란한 페인트 동작은 또 어떻고!

(67)

공을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어쩐지 공을 헛 찰 것 같고, 발, 발등, 새끼발가락, 땅을 딛고 있는 반대편 다리로 온 신경이 분산되면서 스텝이 엉키거나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공을 이상하게 차고 만다. 인간이란 무언가를 의식하는 순간 그 의식의 대상에 필요 이상으로 파괴적인 힘을 주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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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26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 축구 지고 난 후 딱 들어맞는 리뷰입니다 굿뜨!!! 이거 빌려놓고 언제까지 썩힐런지 ㅋㅋ

bookholic 2019-01-26 00:23   좋아요 1 | URL
이번 주말에 즐독하시기를...^^

카알벨루치 2019-01-26 00:2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