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과녁/이정원

 

 

비 그친 사이
고추잠자리 한 쌍 옥상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두 마리가 하나로 포개져 있다

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
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

오늘은 왠지 아찔한 저 체위가 엄숙해서 슬프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러운 과녁으로 꽂혀서
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
땅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나는 임계선 어디쯤
 

문득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앉는 곳이 곧 무덤일
질주의 끝이 곧 휴식일 어느 산란처

죽은 날개는 너무 투명해서 내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아버지는 휘파람을 잘 부셨다. 해질녘이면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곤 하셨다. 아버지 등에 업혀 휘파람 소리를 듣던 날이 있었다. 아버지 발등에 내 발을 올리고 걸음마를 하던 날도 있었다. 아버지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올려다보면 아버지가 동화속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커보였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오빠생각’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셨다.‘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로 끝나며 여운을 잔뜩 남겨주던 노래. 노래가 끝나면 아버지는 늘 ‘그만 못 사왔네’하시며 다음에는 꼭 구두를 사다주겠다고 약속 하셨었다. 노래를 부를수록 약속은 무한정 연기되곤 했다. 구두도 없고 약속도 잊고 더 이상 아버지의 등을 탐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등에 대한 기억은 여전하다. 업히면 넓고 따뜻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면 다이알 비누냄새가 났다. 시큼한 땀 냄새가 나는 날도 많았지만 그것이 피붙이의 냄새인 것 마냥 향기롭기까지 했다. 어깨 너머로는 세상이 신작로처럼 뻥 뚫려 보였다.

 
무너져 내릴 만큼 마음 고단한 날. 따뜻한 등이 그리운 날. ‘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나즈막이 소리 내어 읖조려 본다. 업고 업혀 다다른 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거 생각하고 싶지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3-31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31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여겼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뻔뻔스럽게 여겨져 기도는 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에는 안 찾다가 저 아쉬운 때만 찾는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시인은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달라고 한다. ‘나날이 낯선/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세상에 서게’해달라고 한다.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과 낯선 눈으로 세상에 서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또 시인은‘회고는/노쇠의 증좌임을’믿고, ‘밤벌레처럼 유년을/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해달라고 한다. 시적 지향을 갖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담을 늘어놓는 시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경계하는 자기 확인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시인에게 기도는 절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의 골이 깊을수록 성취의 봉우리는 높을 것이다.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있'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시를 쓰기보다 시를 살것이다. 함께 기도하기로 하자.

 

   

위험한 독서  
박현수 (지은이) |

천년의시작 | 2006년 10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3-26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7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0-03-27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멘!! 외치고 싶은 시네요.^^

반딧불이 2010-03-27 11:12   좋아요 0 | URL
아참. 기도가 끝나면 해야하는거지요. 아멘!!!

알로하 2010-04-2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9 22:51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반갑습니다.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구요.
 

 


명자꽃

 

 

                                                                    안도현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초경(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낙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홍등(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 만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자진(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집 앞에 한 무더기 명자나무가 있다. 봉오리들이 금방이라도 필 것처럼 물이 올랐다. 명자꽃은 봄꽃 중 가장먼저 나와 눈을 맞춘다. 날 선 바람 속에 피는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명자꽃은 그 아름다움을 잃고 만다. 머지않은 꽃을 기다리며 시를 읽는다.

시인은 흔하디흔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것도 바라보기의 최종심금인 짝사랑이 소재다.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사랑은 일종의 병이다. 누구나 앓는 인류의 지병인 셈인데 어느 누구도 치료제를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사랑의 예방접종을 하고 항체를 만들어야 한다. 가능할까?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꽃, 산당화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꽃.
이 꽃의 한 살이와 사랑을 신묘하게 얽었다. 꽃이 피듯 사랑이 싹트고 잎이 나듯 파랗게 뒤척이고 식물도감을 뒤척이는 사이 명자누나는 꽃이 진 추한 밑동까지 다 보여준다. 서사와 시간성은 산문시의 특징이다. 이 시는 산문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더불어 희미하게나마 농촌 원체험 세대로서의 경험과 산업화로 인한 도시빈민의 삶까지 보여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3-17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3-2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일상의 언어가 쉬이 구분되지 않는 요즘에, 안도현의 시야 말로 정녕 詩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듯 합니다.
멋부림없이 자늑자늑 읊어가는 저 추억의 아스라함 속에서 저 또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좋은 글 보여주셔서 감사^^

반딧불이 2010-03-22 01:47   좋아요 0 | URL
한용운 같기도 하고 백석 같기도 하고 또 그런것이 안도현이란 생각도 하면서 명자나무 가지를 꺾어다 놓고 읽어본답니다. '자늑자늑'이라는 말씀이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 ^.~

blanca 2010-04-1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자꽃이 진짜로 있군요. 우아! 이 시를 읽으니 시인이 소설가보다 한 수 위라는 조정래샘 말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가 갑니다. 반딧불이님이 명자꽃을 보면서 시를 읽는 모습이 너무 부럽네요. 아름다워요!

반딧불이 2010-04-20 00:02   좋아요 0 | URL
아 블랑카님..요즈음 명자꽃 철이랍니다. 집앞에 지금 한창 피었어요. 시골에서는 이 꽃을 보면 여자들이 바람난다는 속설도 있다고해요. 주변에 흔한 꽃이니 블랑카님도 한번 보세요. 반드시 반하실거에요.
 

 


혼몽의 집

 

                  김형수

 

 

떠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죽음의 링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보면
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시대의 슬픈 관능 위에서
더불어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觸手들아
 

아프고 병든
인간들의 극장에서
맹인가수처럼
우리는 노래했다

세상의 혼란과 사랑의 목마름을
저 완강한 삶의 공허 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인생을, 이별을

이제는 목도 쉬고
듣는 이도 없다
나도 들어가 편하게 눕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하마드 알리가
링 위에 누우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
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권투 글러브를 낀 주먹에 맞아본 적 있다. 단 한방으로 나는 기절했다. 그 둔중한 충격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만화에만 있는 줄 알았던 반짝이는 별,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 나도 봤다.  

아무리 때리고 맞는 것이 일인 권투 선수라지만 수없이 얻어터져서 쓰러지면 저런 문이 보일 것 같다. 그냥 의식을 놓고 들어가 쉬고 싶은 문 말이다. 무하마드 알리는 죽도록 맞고 쓰러졌을 때 저 문을 보았단다. 그는 그것을 ‘혼몽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시인도 권투선수와 다르지 않다. 혼란한 세상의 펀치, 목마른 사랑의 어퍼컷, 완강한 삶이 날린 라이트 훅 모두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같은 펀치를 맞은 사람들을 위해 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발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라는 말이 단지 알리의 말에 그치기를 바란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3-02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0-03-0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요????전 초등학교때 태권도를 배우던 남동생에게 발길로 차인후로 그 아이를 아직도 두려워하는거 같아요~.ㅋㅎㅎㅎㅎ

반딧불이 2010-03-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십여년이 지난 어느날 제 남동생이 학교 선배라며 데리고 온 녀석이 저를 때렸던 녀석이었거든요. 제가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 얘길 했었는데...녀석은 기억도 못하더라구요. 하물며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팰수 있냐며 자기는 그런놈 아니라고 발뺌까지 하더만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03-0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릴 적에 얻어맞은 애한테는 어른이 된 후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움찔하죠.
저도 그런 면에선 옛날에 저 팬 애랑 부딪히면 지금은 덩치도 비슷하고 꿇릴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움찔거리게 되더군요. 죄진 것도 없는데ㅠㅠ
아,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이 구절 보고 생각난 게
있어요. 오늘 나가이 다카시의 "로자리오의 사슬"이란 수필 읽었는데 거기서 백혈병 걸린 남편 두고 떠난 아내 심정이 저런 심정일까... 그런 생각드네요

반딧불이 2010-03-06 00:24   좋아요 0 | URL
어? 제게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네요. 저도 꼭 읽어볼께요. 마음님은 일본문학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03-1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일본문학 수업 들으면서 알게 된 이름이었네요. 저도 요즘에 소세키나 아쿠타가와를 축으로 근대 일본문학에 관심이 생기면서 교양수업 하나 들었는데, 그 수업 첫 강의에서 듣게 된 이름입니다. 물리학자/의사로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폭 당시의 생존자인 사람인데
http://blog.naver.com/dogona2006?Redirect=Log&logNo=80044201436
수필 전문입니다.(스캔본입니다마는) 요즘 세상에서 보면 아내가 너무 헌신적이라든가
"반딧불의 숲" 같은 기분도 들어 한국 사람이 꼭 공감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번 읽어보시려면 위 사이트 참조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

반딧불이 2010-03-11 01:49   좋아요 0 | URL
아, 마음님 방사능을 연구했던 학자라고 <로사리오의 사슬> <아버지의 기도>라는 책이 있어서 찜만 해두고 있었어요. 이렇게 바로 읽어볼 수 있게 링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시나보군요.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스트레인지러브 2010-03-16 12:00   좋아요 0 | URL
저도 별로 아는 게 없어요. 일본어 부전공이긴 한데 막 시작한 단계라서 ^^;
제가 더 많이 배워야 할 입장입죠. ㅎㅎ
 


아배생각/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사포로 밀고 싶을 만큼 두드러기가 극성을 부리는 밤을 보내고 동틀 무렵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놀라 깨어 무심결에 받은 전화기에서 “아야, 어데가 안 좋다믄서?” 다짜고짜 질문이다. 칠순 지난 아버지다. 8개월째 접어든 두드러기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다. 해마다 환약이며 첩약을 지어 보내는 사람은 자식인 내가 아니라 늘 아버지다. 철마다 나물이며 과일을 보내는 사람도 아버지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게다. 시인처럼 아버지 집 나가신 후에 생각하면 무슨 소용 있으랴. 내년부터는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안부전화만이라도 드리기로 하자.  

시가 재미있기만 한줄 알았더니 감동도 주고 거기다 가르치기까지 한다. 생활이 곧 시가 되어버린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가 아득하기만 하다.  좋은 시를 접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시작법은 없다고 했지만 고마운 마음보다 얄미운 마음이 앞선다. 이래저래 사람되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2-29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2-2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간만에 감동적인 글을 보았네요.
시도 좋고 해설도 좋으나 좋다는 말보단 그윽함이라 해야 할 듯.
멋집니다^^

반딧불이 2010-02-22 16: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바밤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