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이 '먼 곳'인데 시인은 세속과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하다. 인적없는 소나무 숲을 오래 걸어들어가서 만나는 사찰같다고 해야할까.

 

시인은 왜 세번째 돌을 놓을 수 없는가. 두번째 돌에 연이어 세번째 돌을 놓으면 중심이 생겨나고 주변이 생겨난다.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수평? 두번째 시집에 이어 수평에의 지향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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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소장 도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화산에서 살아남기

초원에서 살아남기

바다에서 살아남기

시베리아에서 살아남기

동굴에서 살아남기

남극에서 살아남기

......

 

  - 사는 게 장난이 아닌가봐

 

 

 

 

 

 

내 생의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살아남았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며칠을 앓고 삭정이만 남았다.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저런 책을 읽었더라면 좀 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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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2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제가 잠깐 착각했어요. 저는 반딧불이님의 아드님이 읽고 있는 소장도서에 대한 글인줄 알았거든요. ^^;;

그런데 시가 짧으면서도 요즘 사회의 한 단면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대부분 '~~에서 살아남기'라니,,
아이러니하네요.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요 ^^;;

반딧불이 2012-03-22 01:15   좋아요 0 | URL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개와 꼰대는 읽지 마시오. 언니야, 풍자가 아니면 자위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인이 의도한 것도 바로 cyrus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맥거핀 2012-03-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재밌네요. 근데 저런 책을 읽어서라도 살아남으면 다행인데, 요새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이 서글프군요.

반딧불이 2012-03-22 01:17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시의 말미에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를 한 줄 더 보태고 싶었어요.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죠.
 

 

이랴/신원철

 

 

고조선 때쯤?

아사달 살던 암팡진 궁둥이의 여자

소를 몰고 산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도무지 소란 놈이 느릿느릿 말을 안 듣더란 말이지

화가 치민 여자

그놈을 번쩍 들어 머리에 이었단 말야

뾰족한 머리가 배를 깊이 치받으니

창자가 터질 지경이어서

눈물 콧물 흘리며 소가 애걸복걸 했다는군

그때부터 느릿느릿 제 버릇 나오면

 

너 이놈 또 머리에 "이랴?"

 

쪽진 머리, 목, 어깨, 허리, 작지만

딱 벌어진 궁둥이로

못난 역사를 떠받치고 온

 

 

 

서걱거리는 삶을 다독이듯 봄비가 내렸다. 젖은 마음을 더이상 축축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이 눅눅한 마음을 가볍게 해줄 즉각적인 무언가를 찾게 된다. 하이킥 몇 편을 다운 받아 보고 계간지를 펼쳤더니 이 시가 눈에 띄었다. '이랴'라는 말이 저렇게 생겨났구나.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매일 게으른 내 손을 반성하면서, 또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이 봄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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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께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3월이다. 기다리지 않았는데 시인의 부고 소식이 날아 들었다. 발인이 3월 1일이다. 봄은 오고 시인은 가셨다. 가시는 길이지만 화창한 봄빛이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명복을 빈다.

 

게으른 봄이 드디어 오는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봄도 내게 한 소식을 전해왔다. 어딘가에서 한눈 팔다가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이제서야 온다.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고 행여나 땡깡 부릴까 흘겨보지도 못하겠다.

 

봄과 관련한 시어들이 눈에 띄는 건 내 마음의 반영인가.

 

 

 

 

벌판에 이르면/이성부

 

 

지나는 바람에게 말 걸고 싶어

벌판에 이르면 보이누나.

 

매맞고 내려가서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더 튼튼해진 몸 되어 달려오는

봄이 보이누나.

 

아직 털스웨터 벗는 것도 잊어버린

노동에게,

눈곱 낀 줄도 모르고 세상 들여다보는

 

뱀이나 개구리나 벌레들에게,

하나씩 입맞추면서

어깨 두드리면서,

 

달려오는 봄 보이누나,

지친 사람들에게는 눈 바로 뜨고

정신 차리라 고함치는

봄이 보이누나.

 

바로 세워야 하고,

터져 나올 것은 나와야 하는

때가 보이는 구나.

 

 

 

 

혹독한 내 생의 겨울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구 달려오는 봄도 보고싶다. 그러나 두 팔 벌리고 뛰어나가 맞이하지 않겠다. 벅찬 가슴 억누르고 반가워 저절로 나가는 손도 거두어 들이리라. 기다리는 내 맘 아시거든 머물만큼 머물다 가시라. 어느 곳에선가 또 누군가 간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병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가진 시인이 있다. 오늘 그가 어제 썼다며 보내온 시를 읽고 코끝이 매웠다. 병이 시를 짓게 하고 시가 병을 낫게 하고, 병이 사람을 낫게 하는 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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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0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에 이성부 시인의 '벼'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서야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네요.

반딧불이 2012-03-02 18:20   좋아요 0 | URL
하하..여전히 학생이시잖아요~ 저도 잊고 있었는데 부고를 받고 깜짝놀랐답니다. 봄에는 시인의 부고가 많은것 같네요. 쉼보르스카도 가시고...이성부 시인도 가시고..또 한분 계셨는데 생각이 안나네요.
 

 

운명의 힘/권혁웅

 

 

 

혈압이 길 가던 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골목에서 삥을 뜯던 불량배처럼

운명이 뒤에서 아버지 머리를 후려쳤다

나오면 백 원에 힌 대다,

주머니에서 정말로 동전들이 굴러 나왔다

 

됐어, 이제 가 봐

운명은 너무 일찍 그를 귀가 시켰다

 

스무 살 내가 골목에서 그녀와 동행할 때에도

운명은 5센티 이내를 허락하지 않았다

손등이 두 번 스쳤을 뿐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이름이 지척이었다

운명은 집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운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우아하게 담배를 피웠다

떨어진 재가 마루에 배광(背光)을 그렸다

성(聖)조모께서는 자세 한 번 고치지 않고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켰다

운명이 주변에 운집(雲集)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운명이 따라다니며 물었다 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조모가 대답했다

 

이불을 들추면 운명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얇게 코를 고는

그러다 볼륨을 확 높이고야마는

으이그, 내가 못 살아

 

운명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은 아버지도 할머니도 나도  비켜가지 않았다. 때로는 '골목에서 삥을 뜯는 불량배'의 모습으로  때로는 초조하게 누이동생을 기다리는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운명은 제 주인을 놓칠세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따라다니며 물었다. 놈은 늘 기다리고 있다. '으이구, 못살아'하는 말. 들리는 순간  덥친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생의 모퉁이에서 기다리다 뒤통수를 치는 운명에 무릎 꿇고 예의를 갖추기로 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무협시를 읽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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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25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의 힘..시가 무섭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런걸까요..? 그러나 사람은 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반딧불이님의 앞에도 좋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를, 그리고 만들어나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반딧불이 2012-02-25 01:23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두더쥐 잡기 게임 아시죠? 방망이로 치면 머리만 튕겨나오는...
저도 운명의 방망이에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려구요. 이제 튀어오르는 일이 제 일이겠지요? 염려와 위로... 고맙습니다.

쉽싸리 2012-02-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티브 보는데 장석주 시인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진행자가 권혁웅이라는 시인이 청춘의 표상? 같은 시인 세사람을 들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장석주 시인이라 했다고 그러데요. 한 명은 기형도고 또 한명은 이상이었던가?(이 금붕어 기억력...)그때 권혁웅이라는 시인을 처음 들었어요.
시인의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시골같은데서 개 세마리를 키우며 사는데 개들한테 시를 읊어주면 괜찮은 시에는 반응을 한다구 하더군요. ㅎㅎ
저도 두 마리 키우는데 걔들도 먹을것에는 반응이 굉장합니다. 집안에서 뭐 맛난거라고 하면 밖에서 달라고 짓어대지요. 시를 아는? 개와 먹을것에 충실한 개의 운명은 다른거겠죠? ㅎㅎ

자작시는 계속 갈고 닦는 중이신가요? 책으로 낼 계획이라도?
그 상강이라는 시, 너무 좋았는데요...ㅎㅎ

반딧불이 2012-02-28 16:24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쉽싸리님
장석주 시인은 시보다도 문학관련 글을 훨씬 더 많으 쓰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장서가이시기도 하다고 들었구요. 기회 되시면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을 일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묘한 맛이 있답니다.

개를 두 마리나 키우시는군요. 저희집에도 요크셔가 한마리 있는데...'나갈까'하는 말에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뿐 먹을것도 시들합니다. 저도 시를 쓰면 읽어주고 반응을 살펴봐야할까봐요.~
자작시는 좀 모아지면 묶어볼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