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꽃

 

 

                                                                    안도현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초경(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낙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홍등(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 만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자진(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집 앞에 한 무더기 명자나무가 있다. 봉오리들이 금방이라도 필 것처럼 물이 올랐다. 명자꽃은 봄꽃 중 가장먼저 나와 눈을 맞춘다. 날 선 바람 속에 피는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명자꽃은 그 아름다움을 잃고 만다. 머지않은 꽃을 기다리며 시를 읽는다.

시인은 흔하디흔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것도 바라보기의 최종심금인 짝사랑이 소재다.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사랑은 일종의 병이다. 누구나 앓는 인류의 지병인 셈인데 어느 누구도 치료제를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사랑의 예방접종을 하고 항체를 만들어야 한다. 가능할까?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꽃, 산당화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꽃.
이 꽃의 한 살이와 사랑을 신묘하게 얽었다. 꽃이 피듯 사랑이 싹트고 잎이 나듯 파랗게 뒤척이고 식물도감을 뒤척이는 사이 명자누나는 꽃이 진 추한 밑동까지 다 보여준다. 서사와 시간성은 산문시의 특징이다. 이 시는 산문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더불어 희미하게나마 농촌 원체험 세대로서의 경험과 산업화로 인한 도시빈민의 삶까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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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7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3-2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일상의 언어가 쉬이 구분되지 않는 요즘에, 안도현의 시야 말로 정녕 詩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듯 합니다.
멋부림없이 자늑자늑 읊어가는 저 추억의 아스라함 속에서 저 또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좋은 글 보여주셔서 감사^^

반딧불이 2010-03-22 01:47   좋아요 0 | URL
한용운 같기도 하고 백석 같기도 하고 또 그런것이 안도현이란 생각도 하면서 명자나무 가지를 꺾어다 놓고 읽어본답니다. '자늑자늑'이라는 말씀이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 ^.~

blanca 2010-04-1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자꽃이 진짜로 있군요. 우아! 이 시를 읽으니 시인이 소설가보다 한 수 위라는 조정래샘 말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가 갑니다. 반딧불이님이 명자꽃을 보면서 시를 읽는 모습이 너무 부럽네요. 아름다워요!

반딧불이 2010-04-20 00:02   좋아요 0 | URL
아 블랑카님..요즈음 명자꽃 철이랍니다. 집앞에 지금 한창 피었어요. 시골에서는 이 꽃을 보면 여자들이 바람난다는 속설도 있다고해요. 주변에 흔한 꽃이니 블랑카님도 한번 보세요. 반드시 반하실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