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생각/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사포로 밀고 싶을 만큼 두드러기가 극성을 부리는 밤을 보내고 동틀 무렵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놀라 깨어 무심결에 받은 전화기에서 “아야, 어데가 안 좋다믄서?” 다짜고짜 질문이다. 칠순 지난 아버지다. 8개월째 접어든 두드러기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다. 해마다 환약이며 첩약을 지어 보내는 사람은 자식인 내가 아니라 늘 아버지다. 철마다 나물이며 과일을 보내는 사람도 아버지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게다. 시인처럼 아버지 집 나가신 후에 생각하면 무슨 소용 있으랴. 내년부터는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안부전화만이라도 드리기로 하자.  

시가 재미있기만 한줄 알았더니 감동도 주고 거기다 가르치기까지 한다. 생활이 곧 시가 되어버린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가 아득하기만 하다.  좋은 시를 접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시작법은 없다고 했지만 고마운 마음보다 얄미운 마음이 앞선다. 이래저래 사람되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2-29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2-2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간만에 감동적인 글을 보았네요.
시도 좋고 해설도 좋으나 좋다는 말보단 그윽함이라 해야 할 듯.
멋집니다^^

반딧불이 2010-02-22 16: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바밤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