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탐심》 박종진 지음

만년필로 예쁘고 멋있게 글씨를 써보고 싶어 약간의 무리를 해서 유선형의 통통한 워터맨 만년필을 사놓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 계속 아프고 잘 구부러지지 않고 속썩이는 오른손 가운뎃 손가락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책을 빌려왔다.


探心탐심 깊이 살펴보려는 마음

인문이
녹아든 물건

"너 몇살이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사람들끼리 나이를 알아보는 법은 간단하다. 그냥 물어보면 된다. 그러나 대답을 할 수 없는 동물이나 물건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나 개의 나이는 이빨의 모양과 마모 정도로 따져 볼 수 있다. 1966년 석가탑을 보수하다 발견된 현존 최고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연대를 751년 이내로 보는 것도 당시 사용된 종이와 서체, 쓰인 글자 등을 연구하여 알아낸 결과다. - P16

만약에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28일을 다룬 영화가 있다고 하자. 승전국 영국의 수상 로이드 조지 Lloyd George, 1863~1945 가 서명하는 장면에 통통한 유선형만년필이 등장했다면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유선형 만년필은 1929년 쉐퍼의 밸런스 모델을 통해 처음으로 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로이드 조지는 웨일즈어가 새겨진 금으로 만든 워터맨 만년필로 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만년필은 복제되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안목 높은 수집가로 유명했던 메리 왕비(영국의 왕 조지 5세 왕비)에게 전해졌다. 대공황을 배경으로 1933년에 만들어진 영화  <킹콩>이라면 모를까 191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는 유선형 만년필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 여담이지
만 영화 <반지의 제왕>을 연출한 피터 잭슨Peter Jackson 감독의 2005년 작 <킹콩>에는 만년필이 등장하긴 하지만 쉐퍼 밸런스는 아니었다.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 마지막 웨일러
그래서... 밥 말리 앤 웨일러스의 연주 라이브를 찾아 들어보았다. 유튜브에 다양한 버전으로 나와 있었다. 나도 자메이카 음악은 처음 들어보는 거였다.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스카Ska, 1966년 출현한 장르인 록스테디Rocksteady, 레게 음악이 자메이카의 음악이었단 걸 알았다.
레게라니.. 스카라니... 이 책이 아니면 결코 알지 못했을... 음악들...
여러 곡을 들ㅇㅓ 볼 수 있었다. 듣다보니 좋아할 만한 곡들이었다!
Stir It Up
Don‘t Touch the President
Let Him Go
Battering down SEN-tence...

어제 마지막 14장인 페이턴스 플레이스(1960년대1964~1969에 방영된 인기 TV시리즈)를 읽고 지루해서 패스했던 ‘11.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로 돌아와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니 또 잘 읽혔다. 하하... 다시 읽다보니 알게 된건데 시詩와 시인들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라 블루스,흑인 음악의 음반과 소리를 찾아 여행한 사람들에 대한 거였다.
우리 라디오 듣다보면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코너를 듣게 되는데 거기서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들에서 밭에서 집에서 힘들고 고달프고 어렵고 슬프고 즐겁고 기쁠때 부르던 노동요, 노래들을 채집한 소리를 들려주는 건데 그게 생각이 났다.
생으로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들이 정말 좋았다. 대학때 전공 공부할 때도 우리의 민요나 소리를 채집하는 분들이 남겨놓은 소중한 기록문학인 구비문학에 대해 배운 게 생각이 났다.
새삼 기록의 소중함을 배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걸 생각하니 이 11장을 다시 읽길 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 블루스 음악과 흑인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말이다.
작가님 말대로 이건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12
마지막 웨일러

2010년 7월 초, 나는 밥 말리의 첫 밴드였던 웨일러스의 마지막 멤버 버니 웨일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자메이카로 날아갔다. 버니 웨일러가 누군지 모른다면 이 글을 읽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분명 모를 것이다. 그리고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중요한 인물을 새삼스럽게 찾아야 한다는게 어처구니없게 들릴 것이다. - P424

어떤 경우가 됐든, 이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ㅡ웨일러스가 BBC의 음악 프로그램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The Old Grey Whistle Test>에 나와 <스터 잇 업 stir It Up>을 연주하는 영상을 찾아보라. 1973년에 있었던, 그들의 제대로 된 첫 번째 투어였다. 
버니는 밥의 왼쪽에서 스네어드럼으로 하나둘 반복되는 액센트를 넣으면서 고음부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술이 달린 자주색 아랍식 모자Shriner‘s fez에 추상적인 라스타파리안 무늬가 들어간 스웨터 베스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 P425

버니 웨일러를 만나는 건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파이프 드림pipe dream‘이었다. 내가 실제로 파이프를 들고 있는 동안 꾸었던 꿈이니 문자 그대로 파이프 드림이라 할 수있겠다. 나는 자메이카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창의성이라는 면에서 자메이카 음악의 수준이 높다는 건 확실해보인다. 어쩌면 섬이라는 특수성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립은 때로 이런 밀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를 생각해보라. 많은 면에서 낙후된 곳이지만, 한 세기에 예이츠, 베케트, 조이스가 나왔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의 이면 - 개정판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2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특유의 사변적이고 끝없이 미로를 헤매는 듯한 서술 방식에 더하여 독자의 마음을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 때문에 온전히 읽어 내기도 만만치 않았고 거기에 덧붙여 나의 감상을 쓴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한 일임을 읽으면서 이미 알았다. 이승우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을 2024-09-14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가 묵직하지요^^

은하수 2024-09-14 19:41   좋아요 0 | URL
네., 그점이 또 전 너무 좋네요^^
다른작품으로 곧 다시 만나고 싶어요^^

다락방 2024-09-19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는 저의 국내작가 패이버릿 입니다. 너무 좋아요!

그레이스 2024-09-19 13:40   좋아요 1 | URL
저두요

은하수 2024-09-19 13:46   좋아요 1 | URL
이승우 작가님의 자타공인 1번째 마니아님이시잖아요~~^^
리뷰쓰기 힘든 작가 중 한분이시구요 ㅠㅠ 이 작가님에 관한 한 전 앞으로도 읽기에만 힘써야 할 듯해요 ...
 

《펄프헤드》 14. 페이턴스 플레이스
한 주 연장해서 3주나 읽었는데도 다 못읽어 어제 반납했고 아들 이름으로 상호대차 신청해서 다시 받아왔다.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 있으므로 포기가 안된다.

이 에세이의 극히 일부 외에는 거의가 모르는 이야기들이지만 은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문장의 힘 덕분에 계속 읽고 있다. 소재 자체는 다 모르니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읽다 도저히 흥미가 안생기는건 그냥 패스했다.^^
오늘도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란 에세이를 읽다 지루해서 패스했다. 유명 시인들도 별 관심 없는데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라니.. 이름도 모르고 작품은 더더구나...

지금 읽고 있는 <페이턴스 플레이스>는 드라마의 촬영장으로 쓰였던 자신의 집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어내고 있다. 집이 여러 영화에도 등장했고 덕분에 여러 배우들을 만났는데 어느 유명드라마의 시리즈 몇 번째 편 주연 여배우가 어떻다는 둥, 자신의 집에 들여올 가구를 여주인공의 취향과 일치시키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더라는 등등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펼쳐 놓는다. 마치 동네 아줌마들이 미용실에 모여 수다 떨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 같다고나 할까!
드라마 촬영이 계속되는 동안 가족은 촬영팀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살게 되는데,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 도시로 이사 와서 여기 있는 집을 샀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 집에 머무르지 않는 대가로 우리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
우린 마치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로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오셨나요?˝라고 묻곤 했다. (539쪽)

이후로도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지나고 보면 이것이 썩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란걸 알게 된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몇년 간 계속 그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세이 자체를 읽는 나는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할 색다른 경험을 제공해 준다.

시간이 한참 지나 가족이 촬영팀과 더이상 좋은 관계가 아니게 되었는데, 이유는 등장인물도 스토리 진행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고, 그의 집도 감정상 크나큰 손상을 입으면서 처음의 상태가 아닌 채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들의 증오와 미움도 함께인 채로!


우리가 새로 정착한 해변 도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 일명 윌미우드에서는 수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들이 촬영되었다. 이런 추세가 시작된 것은 작고한 프랭크 카프라 주니어가 1980년대 초반에 이곳에서 <파이어스타터 Firestarter>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영상 산업도 그의 주변에서 성장했다. 데니스 호퍼도 이곳에 집을 샀다. 현재 이곳의 다운타운에서 웨이터 일을 하는 아이들의 절반은 엑스트라이거나 배우 지망생이다. 타깃에 가면 바로 앞에 발 킬머가 줄 서 있는 걸 보게 될 것이다. - P526

 이곳에는 촬영장들과 영화학교가 있고, 매우 다양한 촬영 장소들이 있는 것으로 영상 산업계에 널리 알려쳐 있다. 
광활한 바닷가 장면을 찍을 수 있는가 하면, 갑자기 활엽수가 울창한 주택가로 이동할 수 있고, 들판에서 건초트랙터를 탈 수 있는가 하면 번잡한 밤거리를 찍을 수도 있는 등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가능하다.  - P527

우리는 우리 집에 대해 기억이 아닌 기억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온전히 TV를 통해서 우리 집을 경험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일이, 우리가 그곳에 사는 동안 일어났다.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기록한 사진을 보여줄 때 이런 느낌일까. - P540

... 어떻게 이걸 기억하지 못할까, 이런 일이 있었던 걸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온갖 극적인 일들, 심지어 폭력적인 일들까지 일어났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떠날 때의 상태 그대로인 집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티븐 라이트가 1980년대에 그의 코메디 스페셜에서 했던 농담이 자꾸 생각나곤 했다. "도둑이집에 들었는데, 내 물건들을 다 가져가고, 대신 똑같은 복제품들을 그 자리에 놔뒀더라니까요." - P5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시가 지난 후의 기숙사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여간 공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건 점수가 모자라면 졸업하는 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식의 협박성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장문의 사유서와 각서를 함께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의 애인은 그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부길은 그런 애인의 노력을 무시했다. 그녀는 억지로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그의 손에 택시비를 쥐여주었다. 그 돈은 택시비를 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그런 방법으로 여자는 자주 그에게 용돈을 주었다. 책 사서봐. 하고 말하기도 하고 보다 직접적으로, 용돈 없지? 하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그걸 받았다. 마치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의 어머니가 내미는 돈봉투를 어쩔 수 없이 받았던 것처럼. - P259

형식이 내용에 끼치는 영향은 무시되어선 안 된다. 대체로 행동은 의식의 사주를 받지만, 의식이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수도 종종 있다. - P259

반복된 행동은 의식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이런 관계가 남자의 정신에 표나지 않은 굴욕감 같은 것을 심어주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똑같은 유형으로 만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연인들은 오누이처럼 만나고, 어떤 연인들은 친구처럼 산다. 부녀처럼, 또는 모자처럼 지내는 연인도 없지 않다. 애초에 설정된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 P260

박부길은 여자 앞에서 늘 너무 조급했다. 불안하고 초조해했다.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일이 잦았다. 그 흥분은 대개 자기 가슴속에서 자체 생산된 것이었다. 흥분하는 사람은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흥분해 있는 가슴만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도무지 배려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 연인앞에서 연인은 똑바로 서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 관계는 불안하다. 그래서 사고가 생긴다. - P260

그는 최교수의 쾌활한 웃음, 그 웃음이 품고 있는 일종의 건강과 여유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그 치욕의 내용은 질투였을까? 그는 그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왜 그 교수를 싫어했을까?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 교수가 가지고 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부러워한다는 뜻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가장 비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사람이 가장 크게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절로 알게 되지 않던가. - P296

어쨌거나 그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치욕이었다. 그녀는 그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순간에 그는 그렇게 느꼈다. 그 사실은 부정될 수 없었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의 강박은 엉뚱한 사념에 편집적으로 매달렸다. - P297

 그의 얼굴 표정은 그녀가 뒤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거의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 얼굴은 왜 그렇게 단순해서 내부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교수와 ‘노닥거리느라 한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거기다가 그녀는 교수가 자기를 전부터 유난히 예뻐했다는 말도 했다. 그 말은 그의 불타오르는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그의 내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이성이 아니었으므로, 최소한의 분별과 판단을 주도할 이성은그의 내부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 P297

이해할 수 있을까. 이 경우 한없이 가파르고 말할 수 없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마련인 폐쇄적인 남자의 강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그 가파름. 그 극단적 의식이 뚫어내는 변칙적인 공격성의 음침한 쥐구멍을...... - P298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가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리게 되는. 그리하여 도무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식 밖에서는 상식에게 호소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 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절망이다. - P298

나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사랑은 평화를 향해 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감정의 상태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 같다. 감정은 도무지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러나 나의 사랑은 평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 그랬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랑」, 산문집 『이정표』, 209쪽) - 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