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속여먹기는 정말 일도 아니다

오늘 글은 ‘남편’ 분들에게 좀 죄송한 글이다.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지난 봄 이사를 하면서 삶의 군살을 좀 빼자고 결심을 했다.
짐을 좀 줄이자는 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천상병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어머니 심부름 하러 잠깐 왔다가 그 심부름이 끝나면 어머니께로 다시 돌아가는 삶이다.
그러니 마구 쌓아놓고 사는 삶은 절대 아니다.
군더더기를 줄이자면 버리기에 앞서 사는 것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내 사전에는 사는 것은 없다고.
그랬더니 부창부수라 남편은 ‘구입’하자로 단어를 바꿨다.
하는 수 없이 가끔 ‘구입’은 하고 산다.
그래도 약발이 있는지 무얼 사려면 남편은 나의 눈치를 조금은 본다.
그저께 아침에 남편이 말했다. “여보, 책 한권 구입하면 안 될까?”
‘안되기는? 나도 구입해야 할 책 있는데.’
이 말은 속으로 하고 정작 밖으로 한 말은
“또 무슨 책을?” 목소리를 한톤 높였다.

오늘 알라딘에서 책이 왔다. 바로 이것이다.  



<위험한 호기심>은 남편이 원한 책이고 거기 묻어서 구입한 내 책이 세 권이다.
물론 남편은 모른다.
남편은 아직도 왕성한 호기심의 소년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요즘 사진에 필이 꽂힌 나는 책의 편식이 심하다.
가끔 지적 영양 불균형을 우려해 자책해 보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너그럽게 넘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만간 페이퍼로 써볼 참이다.

또 한 가지, 남편은 잡곡을 많이 섞은 밥을 좋아하고 나는 흰쌀밥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잡곡밥이 건강에도 좋고 둘이 살면서 두 가지 밥을 해먹을 수가 없어서 내가 남편에게 맞춘다.
보리쌀, 현미, 율무, 찹쌀, 검정콩을 섞어서 밥을 하는 데 이 잡곡은 미리 물에 불려 놓아야 한다.
어쩌다 깜빡 잊고 미리 불려놓지 못하면 낭패다.
남편은 어쩌다 한 번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도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꼭 식탁에서 “밥이 왜 이래?” 라던지 “밥이 왜 흰색이야?”
한 번도 지적하지 않는 때가 없다.
정말 엄청 화난다.
처음에는 “응, 미리 불려놓는 걸 잊었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같은 사안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편은 같은 사안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꾀를 냈다.
잡곡을 미리 불려놓는 것을 잊었을 때는 검정 쌀을 한 찻숟가락 정도 섞어서 밥을 한다.
그러면 적당한 검정색이 된다.
잡곡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거무스름한 밥을 보고 남편은 너무 행복해 한다.

난 왜 이리 머리가 좋은 거얏!

그런데 교회에 가서 예수쟁이는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날은 마음이 좀 꿀꿀해진다.

*** 오늘은 토요일, ROTC 훈련을 마친 아들이 집으로 옵니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남편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있습니다.
어제 ‘멍멍’ 두 마리 잡고(아! 싫어라),
못 먹는 사람을 위해 삼계탕 열다섯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먹는 것에 별 취미 없는 저여서 좀 별로이지만
더운 여름 마누라 고생하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하는 바른생활 사나이는
친구들 먹이는 것에 많이 행복해 합니다.
그 많은 것, 준비하느라 땀을 엄청 쏟았지만...
‘행복’을 선택하는 건 어차피 자신의 몫이라 사료되어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님들도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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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4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님, 좋은 아침이에요.
ㅎㅎ 사는게 다 비슷하군요. 저도 남편에게 "사자"의 시옷도 얘기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러면서도 알라딘서 남편 커피 사준다는 핑계로 제 책을 살짝 끼워서 주문하지요.

[인상과 풍경]이 있군요. 저도 블랑카님 서재서 보고 [여명]을 이번 주말에 읽을 예정이에요. 중전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2010-07-2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gimssim 2010-07-24 22:21   좋아요 0 | URL
저도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보고 주문했어요.
가을까지 좀 집중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꾸 이렇게 엉뚱한 데로 외도를 합니다.
네 Manci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비로그인 2010-07-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질좋은 백미로 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밥이 최고입니다.
퓨어(pure)한 흰 밥에 뭔가 잡것을 넣으면 그 순간 흰 밥의 미묘하며 깊은 맛이 사라집니다. 진정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입맛이 까다로와서 흰 쌀밥에 콩을 넣으면 쓴 맛을 느낍니다.
찹쌀에도 역시 쓴 맛을 느낍니다.
보리는 거친 질감이 싫습니다.
조는 새가 먹는 것이란 선입견이 있고 거친 질감이 보리이상입니다.
수수는 진득거리고 깨물면 터지는 느낌이 정말 싫습니다.
현미는 푸르스름한 곰팡이 빛깔에 그 냄새가 정말 싫습니다.

잘 찧은 햅쌀로 지은 따스한 쌀밥에 바로 무친 생김치를 올려먹으면
최고지요!!


gimssim 2010-07-24 22:13   좋아요 0 | URL
남편은 흰쌀밥에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저는 더운 김이 술술 올라오는 금방 지은 흰쌀밥을 좋아하는데.
그걸 어떻게 먹느냐고, 절대 뜨거우면 안되요, 적당히 식은밥이라야.

근데 한사님, 정말 까다로운 입맛 맞네요.
우리 집에선 그러면 밥그릇 뺏기는 수가 있는데...ㅎㅎㅎ

stella.K 2010-07-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중전님도 참...지혜죠.
근데 부군과 좀 반대신 것 같네요.
잡곡밥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물론 가끔 쌀밥만 먹는 것도 맛있긴 한데
저희는 항상 잡곡밥을 먹고 사는지라 미끈하고 밋밋해서 그다지...
습관인 것 같아요.
장성한 아드님이 계셨네요. 지금쯤 만나셨을라나...?
반가우시겠어요.^^

gimssim 2010-07-24 22:16   좋아요 0 | URL
우리 부부는 정말 반대인 것이 많아요.
책으로 써도 한 권은 될 터이지요.
아들은 만났고 키가 185센티미터인데 훈련 받느라 몸무게가 73킬로로 왔네요.
집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하루 여섯끼씩 먹일 참이에요.

sslmo 2010-07-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연배가 위신 것 같아,이런 말씀 드리기가 외람되지만~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몬 데리고 산다는 속담이 중전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중전님과 함께 사시는 분이라면,그 분도 내공이 보통이 아닐 듯~^^

gimssim 2010-07-25 13:40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만만찮은 내공, 지조가 있다보니 때로 힘이 들 때도 많습니다.
서로가 좀 적당하면 좋을텐데 말이지요.

프레이야 2010-07-2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울 땐 주방에 있는 게 제일 고역이에요.
삼계탕 열다섯이요? 중전님, 삶의 내공을 언제 다 배울까요? 전.ㅎㅎ

gimssim 2010-07-24 22:22   좋아요 0 | URL
그전에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무서운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어요.
사람의 입하고 손이래요.
그 말씀이 맞아요.
멍멍 두마리, 삼계탕 열다섯 마리를 다 먹고, 치웠으니.
입과 손...맞지요?
프레이야님.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어요. 안닥치는 게 좋은 일이지만...ㅎㅎ

순오기 2010-07-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그렇게 많은 손님을 치루다니욧!
저도 광주에 처음 와선 남편 손님들 다 집으로 오게 했는데
애가 셋 되니까, 절대 오라는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점차 만남도 뜸해졌고... 지금은 남자들끼리만 애경사에 만나는 듯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바른생활'님께서 어깨는 좀 주물러주셨나 몰라요.^^

gimssim 2010-07-26 07:25   좋아요 0 | URL
흐흐흐...우리집 바른생활은 손님보내고,
설거지 마치고(집앞 학교 소나무숲에서 모임을 했어요)
집에 오니 비가 와서 분위기 된다며 우산 쓰고 산책을 가자고 하네요.
기어이 '지금이 산책갈 상황이냐?' 소리를 질렀어요.
그랬더니 그럼 지금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등산을 가자네요.
품위있는 '중전'은 물건너 가고 결국은 '싸움닭'이 되고 맙니다.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0-07-2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 잡곡 불리시느라 고생하시네요.
전 미리 몽땅 불려서 냉동실에 넣어놨어요. 누가 그리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밥 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쓰고 있어염.. ^^

언니, 동창회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여. 저는 엄두도 못 낼 일이예여~

gimssim 2010-07-26 21:44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근데 냉동실이 만땅이어서.
동창회는 정말 사람이 많아서 걱정 많이 했어요.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주셨지요.
등산모자 네 개 사서 하나씩 선물로 드렸지요.
 

앗! 중전의 실수

*** 며칠 전, 블랑가님의 실수담을 페이퍼로 읽고 잠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따끈따끈한 에피소드 하나 올립니다.

대구에서 남편 친구 내외가 왔다.
친구라고 하지만 막역한 사이는 아니고 서로가 좀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그런 친구다.
집에서 수박을 먹고 근처로 드라이브 갔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오 분여만 가면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이런 입지조건이니 우리 집은 친구들의 로망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좀 죽을 맛이다.
휴가철이 되니 벌써 예약이 줄을 섰다.
펜션이고 횟집이고 널렸지만, 남편의 얼굴을 무시하지 못할 처지이지만
그래도 그게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남편의 친구들은 ‘고성방가’ ‘음주가무’ '주색잡기' 와는 거리가 멀다.
그건 내 맘에도 든다.

한여름 산사를 방문하고, 오솔길을 두어 시간 걸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 갔다.
우리가 내는 거여서 눈치 볼 것도 없이 -상대가 사는 경우엔 그들의 형편을 살펴야 하므로 눈치가 보일 경우가 있다 - 자연산 회를 시켰다.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동안 밀린 얘기들을 하는 사이에 간단한 앞요리가 나왔다.
우리 동네에서 이것을 ‘찌게다시’라고 한다(표준말을 찾아봐야겠다).
바로 그 때, 머리 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이...
표정관리를 하면서 식탁 아래로 가방을 확인해 봤더니 이런이런...지갑을 안갖고 온거다.
남편에게는 물으나마나였지만(남편은 마누라는 열심히 갖고(?) 다녀도 지갑은 잘 안 갖고 다닌다) 혹시나 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역시나였다.
남편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봉급이 통장으로 들어오고, 얼마간의 잡비를 쓰는 것 외엔 모든 돈 관리는 내가 한다.
쇼핑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싫어하니 별로 돈 쓸 일도 없는 사람이다.
지금에야 좀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외출 할 때, 돈 있냐고 물으면 있다는 거다.
경험에 의하면 절대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현관에서 지갑검사를 해 보면 만 원짜리 한 장 달랑 있을 때도 있다.
육십년 대를 사는 지 아직까지도 만 원이면 웬만한 건 다 되는 줄로 안다.
그러더니 언젠가 혼자 모임에 갔다 와서 한다는 소리가
“여보, 이 교수가 내 옆에 앉았는데 지갑에 보니까 돈이 많더라. 만 원짜리가 서른 장은 되보이더라.”
너무 심각하게 말하기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다른 사람도 다 자기처럼 만 원짜리 달랑 하나 넣어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나보다.
“그래서?”
짐짓 되물어 봤더니 이제부터 자기도 그렇게 해달라는 거다.
지금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왔고 또 벌고 있는데 그까짓 것 못해주랴 싶어서 요즘엔 한 이십 만원은 늘 채워주고 있다.
그러면 뭘 해!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서 지금 같은 때 써먹을 수도 없는 걸.

사설이 좀 길었지만... 너무 난감했다.
남편이나 나나 좀 솔직한 게 무기이긴 하지만 ‘지갑 안 갖고 왔으니 당신이 밥 값 내라’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좀 전에 너무 호기 있게 주문한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되실 터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이삼 분 사이에 이뤄진 일이다. 

찌개다시가 다 차려지자 난 화장실 가는 척 은근슬쩍 나왔다.
팔십 킬로 규정 속도를 백이십 킬로로 달려서 집으로 갔다.
홈그라운드니 속도감시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는 훤히 꿰고 있다.
찌개다시를 다 먹을 때 쯤, 원위치로 돌아왔다.

사실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집에서 나갈 때, 책상 서랍에 넣어둔 지갑을 챙기기는 했다.
내 친구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항상 외출준비 가방을 싸둔다고 했다.
그 가방에다 필요한 건 다 넣어둔다는 거였다. 열쇠, 폰, 지갑, 화장품 등등.
나는 그게 안 된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의 ‘구두’처럼 나는 ‘가방’이다.
나갈 때마다 필이 꽂히는 가방이어야 하기에 내 친구처럼은 안 된다.
그래서 외출에서 돌아오면 가방의 모든 소지품을 제 자리에 갖다 둔다.  
나는 외출 할 때면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물론 웬만하면 SLR카메라를 가지고 가지만 남편하고 외출할 때는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갈 때가 많다.
남편은 내가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안하지만 내가 무언가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면 그런 표정이 얼굴에 묻어난다.
물론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쿨한’ 남편인척 더 좋은 카메라를 사라고도 한다.

내가 지갑이라고 가지고 간 게 바로 ‘똑딱이’ 카메라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남편은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지.’ 정도로 넘어갔다.
만약 알았으면 ‘좀 적당히 미쳐!’ 잔소리를 해댈 게 뻔하다.

이런 정열이라면 난 정말 좋은 ‘찍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순발력이 좋은 아줌마이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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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7-2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그라운드여서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중전님의 순발력이 아주 맘에 듭니다ㅋㅋㅋㅋㅋㅋ

gimssim 2010-07-23 22:42   좋아요 0 | URL
그래요. 홈 그라운드의 잇점이지요.
순발력이라... 이것도 위안이라 생각하고 넘어갑니다요.클클클...

꿈꾸는섬 2010-07-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실수를 바로잡는 순발력 정말 대단하십니다. 상대방을 난감하게 하지 않기 위한 중전님의 배려가 너무 예쁘세요.^^

gimssim 2010-07-24 07:12   좋아요 0 | URL
칭찬이지요? 고마워요.
난 아직 좀 더 자라야해. 칭찬을 먹고! ㅎㅎㅎ

sslmo 2010-07-2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도 저렇게 물건을 구획나눠 고 자리에다 놓는걸 좋아하는데...
근데,저희 아들이 그걸 배워 너무 연연해 하는지라,
요즘은 다시 흐트러 놓으려고 합니다만~(,.)

저도 중전님이 맘에 듭니다.
순발력 좋은 '아줌마'셔서 더 맘에 듭니다~^^

gimssim 2010-07-24 07:14   좋아요 0 | URL
저도 나머지는 대충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책상을 제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라...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것 보다 때로 이런 실수도 얘깃거리가 되니,
그렇게 위안해 봅니다.
 


안으로 거느린 행복 ... 헝겊인형 ‘소닉’

지난 봄, 이사를 앞두고 살림살이들을 좀 찬찬히 정리를 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들은 오래 전에 학업 때문에 집을 떠나고 우리 부부만 있는데도 집안 구석구석 살림살이들이 넘쳐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무게가 느는 것만큼이나 살림살이가 느는 것도 부담스럽다.
오래 입지 않은 옷은 잘 매만져서 꼭 필요한 곳에 보내고,
쓰지 않는 살림살이도 이웃에 나눠주려고 따로 챙겨두었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서재는 삼면에 꽉 들어차 있는 책장으로도 수납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책들이 있다.
그것들도 이제 좀 정리를 해서 꼭 갖고 있어야 하지 않는 책이면 좀 간추려서
근처 도서관에라도 기증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렇게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이 녀석을 발견했다.
기숙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난 아들의 것이다.
아들은 어느 듯 자라서 이 녀석을 가지고 놀 나이가 지났지만
아들의 책장 한쪽에서 우리 부부와 지내오고 있었다.
다섯 살 때 집안이 전소되는 화재를 만났는데 자칫하면 가슴에 묻을 뻔 한 아들이다.
큰 화상은 입지는 않았지만 많이 놀란 터라 병원에 입원을 시켜놓고
무엇으로 이 아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우리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서 사준 인형이다.
‘소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은
당시에 텔레비전에서 상영하던 만화영화의 캐릭터였다.
불길에 그을린 귀 땜에 쓰라렸을 텐데
인형을 보고 환하게 웃던 아들의 모습이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남편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리를 바꿔 앉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숱하게 이사를 다녔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를 네 곳, 중학교를 세 곳을 거쳐서 졸업을 했다.
어느 날, 축구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아들은 학교 축구팀 부주장이라고 했다.
내가 “축구는 네가 제일 잘한다며?”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의 대답이 전학을 온 얘는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주장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 세계에도 텃세가 있나보다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날 밤 베갯머리를 적시며 혼자 소리 죽여 울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아예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집에 오려면 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공부하기도 벅찬 학교였다.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어미인 나는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제 집을 떠나면 언제 다시 아들을 품에 둘 수 있을까 싶었다.
대학을 가고, 군대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면
집에서 지낼 시간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봄날의 어느 한 나절, 손때 묻은 작은 인형 하나로
사랑하는 내 아들과의 추억에 오래도록 젖을 수가 있었다.
아들은 어미의 바람대로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을 했다.
이 년 동안 호주 워킹을 갔다가 복학하여 이제 사학년이다.
내년이면 졸업을 하고 ROTC 장교로 임관을 할 터이다.
식물도 자주 옮겨 다니면 몸살을 하고 뿌리내리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숱하게 옮겨 다니고도 제대로 자기의 몫을 잘 감당해준 아들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안으로 거느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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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나는 글에 제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저도 아들이 좀 더 자라면 저와 함께 보낼 시간들이 별로 없겠단 생각이 많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함께 할 수 있을때 즐겨보려구요.^^

gimssim 2010-07-22 22:09   좋아요 0 | URL
그래요.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고 보면 너무 순간적인 것 같아요.
우리 아들은 방학을 했는데 훈련받느라 집에도 못오고, 드디어 내일 끝나는 날이군요.
이번 주간 날씨가 너무 더워 아들 생각 많이 했어요.

전호인 2010-07-2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에 대한 엄마의 진한 사랑이 감동입니다.
그런 사랑 더 많이 나눠주세욤.
엄마의 사랑!!!
저도 엄마의 사랑이 어떤 것일까 받고 싶네요. ㅠㅠ

gimssim 2010-07-22 22:10   좋아요 0 | URL
모든 엄마는 좀 극성이지요.
이제 좀 쿨~해지는 연습도 하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10-07-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오호!!

아이들이 청년으로 자라면 흐뭇하며 한편으론,, 그렇습니다. 하하


gimssim 2010-07-22 22:1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했어요.
저 보다 남편이 더 좋아하지만요.

순오기 2010-07-22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청년은 아름다운 어머님의 사랑으로 완성됐겠지요~^^
뜨거움이 제게도 왈칵~~~

gimssim 2010-07-22 22:14   좋아요 0 | URL
청소년기에 너무 많이 옮겨다닌 탓에 미안함이 많지요.
우리 아이들은 저에게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blanca 2010-07-22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중에는 이런 글을 쓰고 싶어요...가슴이 뭉클합니다.

gimssim 2010-07-22 22:1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세상의 모든 엄마는 이런 글을 쓸 수 있어요.
아이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느끼는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0-07-23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물에는 기억이 있어요. 그 기억이 없다면 사물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gimssim 2010-07-23 09:54   좋아요 0 | URL
그래요.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기억이 있지요.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자작나무 숲

내친 김에 눈에 싸인 자작나무 숲으로 갑니다. 

겨울의 시베리아는 영하 3,40도가 기본이라는데  

여기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영하 25도 정도였습니다. 

사실, 한겨울 시베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영하 3,40도의 추위와 맞서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는 희망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정비석의 수필에서 '여인의 속살'이라고 은유한 자작나무, 숲입니다.   

*** 자작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정비석의 <산정무한>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저는 '여인의 속살'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아낙네의 살결'이군요.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樹中)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우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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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2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자작나무 숲 환상적이네요.
한여름에 맛보는 시베리아의 겨울~ ^^

gimssim 2010-07-21 22:19   좋아요 0 | URL
더위가 좀 가시는지요?
그 때를 추억하니 마음이 서늘해져 옵니다.

pjy 2010-07-2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이곳에 계셨단 말입니까?? 그야말로 환상적인 곳입니다..
고즈넉하면서도 밤이 되면 도시의 소음과는 다른 감각이 느껴질듯 싶습니다..

gimssim 2010-07-21 22:20   좋아요 0 | URL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대지 위에 오직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습니다.

sslmo 2010-07-2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중전님~
오가며 자주 뵜었는데,댓글은 처음이네요.

자작나무 숲은 처음 보는데...참 좋다라는 말이 무색하네요.
같은 시점에서 렌즈를 점점 당겨 찍으신 건가요?
(마지막은 차 안에서 찍으신 듯~^^)

gimssim 2010-07-21 22:21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같은 시점은 아니구요, 마지막 사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은 것 맞습니다.
한 나절을 달려도 저런 숲이었습니다.

꿈꾸는섬 2010-07-21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작나무 숲 정말 환상이에요. 중전님 덕에 멋진 구경 하네요.^^

gimssim 2010-07-21 22:23   좋아요 0 | URL
시베리야의 추위를 견디는 나무지요.
그래서 저렇게 키만 큰듯 보입니다.

굿바이 2010-07-21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만 들었던 자작나무 숲이군요. 이 숲의 정적이 궁금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gimssim 2010-07-21 23:55   좋아요 0 | URL
추운 곳에선 소리도 얼어붙나, 그런 생각을 잠시 한 기억이 납니다.
그야말로 '정적'이었어요.

후애(厚愛) 2010-07-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작나무 숲 정말 처음봅니다.
정말 멋집니다!^^

gimssim 2010-07-22 14:10   좋아요 0 | URL
실재로 보면 더 멋져요.
한여름 속에서 한겨울을 추억합니다.
 

 1 

여름날의 일기

여름 한낮의 풍경은 현기증이 납니다.
어제 밤늦게 잔대다 새벽기도 갔다 와서 아침 먹고 잠시 눈 붙였다가
비몽사몽간 노인요양병원에 가서 재롱을 떨고 왔는대도
여름 낮은 아직 정점에서 맹위를 떨칩니다.
노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저도 노인이 되면
다른 누군가의 손길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 고쳐먹기로 했어요.
지난주에 할아버지 할머니 세례 받으시는 것을 제가 사진을 찍었거든요.
사진이 박힌 세례증서를 갖다드리느라 안갈래야 안갈 수가 없었어요.
이래저래 하나님께서 저의 코를 꿰시는 것이겠지요.

여름 한낮,
가만히 있어서 땀이 뻘뻘 나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사진 책을 보고 사진 공부를 합니다.
그냥 보고 넘어가도 되는데 아무래도 짧은 메모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옆에서 보던 남편은 또 한소리 하는군요.
“OOO(제 이름)!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말허리를 냉큼 잘라 제가 대답합니다.
“그랬으면 너무 잘나가느라 당신이랑 결혼 안했겠지?”
늘 본전도 못찾으면서 건드리기는 왜 건드려!
열이 난 김에 더운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옵니다.
저는 다소 커피광입니다. 마신 역사도 오래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더운 날에도 뜨거운 커피만을 고집합니다.
냉커피, 캔커피는 안마십니다.

그러고 보니 알라딘 머그잔이군요.
암튼 알라딘에서 이런 저에게 상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제 저녁이 되면 또 한 끼 밥을 먹고 잠을 자겠지요.
우리 집의 ‘늙어가는’ 새나라의 어린이는 열시면 잠자리에 듭니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기 싫은, 그와 함께 사는 아줌마는 열두 시에 잠자리에 듭니다.

오늘은 참 무더운 하루였습니다.
이런 날씨가 한 달은 계속되겠지요.

- 오늘의 일기 끝.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에 가거나 다른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일기도 미리 써둔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일기를 좀 일찍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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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2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님 저도 지금 뜨거운 커피 마시며 중전님 글 읽고 있어요. 사진 공부 하세요? 우앙, 저도 사진 관심은 많은데...그래서 요새는 사진기만 보면 무슨 기종인가요.? 하고 낯선 사람에게 묻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고 힘들답니다. 중요한 건 사진기가 아닐텐데...저도 열 두시가 잠자는 시간이에요^^

gimssim 2010-07-20 22:43   좋아요 0 | URL
뜨거운 커피...좋지요.
사진공부 독학으로요. 머리에 김 술술 납니다.
관심이 있으면 일단 박치기를 하시는 게 좋은 데요(아! 갈수록 왜 이렇게 입이 험해지는지요).

순오기 2010-07-2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본전도 못 찾음시롱 건드리긴요.ㅋㅋ
저도 일년 열두 달 뜨거운 커피가 좋아요~ ^^

gimssim 2010-07-20 22:44   좋아요 0 | URL
전 요즘 옆에서 건드리는 것...잘 못참아요.
닭 띠도 아닌데 말이지요. 싸움닭!

전호인 2010-07-20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덥고 짜증날 때 열받게 하면 돌아가는 답은?
.
.
.
.
뻔할 뻔짜입니당! ㅋㅋ

gimssim 2010-07-20 22:45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을 땐 부부도 자기 팔 자기가 흔들 것!
우리 집은 매일 주지시켜도 안됩니다.

꿈꾸는섬 2010-07-2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커피는 역시 뜨거워야 제 맛이죠.ㅎㅎ
저희 집에도 알라딘 머그잔이 세개나 있어요.^^ 두개는 조카들에게 선물했었구요.ㅎㅎ 알라딘 머그잔 전 예쁘더라구요.

gimssim 2010-07-21 22:25   좋아요 0 | URL
커피는 무릇, 죽음처럼 쓰고, 지옥처럼 뜨거워야한다고!
너무 살벌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