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중전의 실수

*** 며칠 전, 블랑가님의 실수담을 페이퍼로 읽고 잠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따끈따끈한 에피소드 하나 올립니다.

대구에서 남편 친구 내외가 왔다.
친구라고 하지만 막역한 사이는 아니고 서로가 좀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그런 친구다.
집에서 수박을 먹고 근처로 드라이브 갔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오 분여만 가면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이런 입지조건이니 우리 집은 친구들의 로망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좀 죽을 맛이다.
휴가철이 되니 벌써 예약이 줄을 섰다.
펜션이고 횟집이고 널렸지만, 남편의 얼굴을 무시하지 못할 처지이지만
그래도 그게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남편의 친구들은 ‘고성방가’ ‘음주가무’ '주색잡기' 와는 거리가 멀다.
그건 내 맘에도 든다.

한여름 산사를 방문하고, 오솔길을 두어 시간 걸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 갔다.
우리가 내는 거여서 눈치 볼 것도 없이 -상대가 사는 경우엔 그들의 형편을 살펴야 하므로 눈치가 보일 경우가 있다 - 자연산 회를 시켰다.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동안 밀린 얘기들을 하는 사이에 간단한 앞요리가 나왔다.
우리 동네에서 이것을 ‘찌게다시’라고 한다(표준말을 찾아봐야겠다).
바로 그 때, 머리 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이...
표정관리를 하면서 식탁 아래로 가방을 확인해 봤더니 이런이런...지갑을 안갖고 온거다.
남편에게는 물으나마나였지만(남편은 마누라는 열심히 갖고(?) 다녀도 지갑은 잘 안 갖고 다닌다) 혹시나 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역시나였다.
남편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봉급이 통장으로 들어오고, 얼마간의 잡비를 쓰는 것 외엔 모든 돈 관리는 내가 한다.
쇼핑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싫어하니 별로 돈 쓸 일도 없는 사람이다.
지금에야 좀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외출 할 때, 돈 있냐고 물으면 있다는 거다.
경험에 의하면 절대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현관에서 지갑검사를 해 보면 만 원짜리 한 장 달랑 있을 때도 있다.
육십년 대를 사는 지 아직까지도 만 원이면 웬만한 건 다 되는 줄로 안다.
그러더니 언젠가 혼자 모임에 갔다 와서 한다는 소리가
“여보, 이 교수가 내 옆에 앉았는데 지갑에 보니까 돈이 많더라. 만 원짜리가 서른 장은 되보이더라.”
너무 심각하게 말하기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다른 사람도 다 자기처럼 만 원짜리 달랑 하나 넣어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나보다.
“그래서?”
짐짓 되물어 봤더니 이제부터 자기도 그렇게 해달라는 거다.
지금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왔고 또 벌고 있는데 그까짓 것 못해주랴 싶어서 요즘엔 한 이십 만원은 늘 채워주고 있다.
그러면 뭘 해!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서 지금 같은 때 써먹을 수도 없는 걸.

사설이 좀 길었지만... 너무 난감했다.
남편이나 나나 좀 솔직한 게 무기이긴 하지만 ‘지갑 안 갖고 왔으니 당신이 밥 값 내라’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좀 전에 너무 호기 있게 주문한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되실 터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이삼 분 사이에 이뤄진 일이다. 

찌개다시가 다 차려지자 난 화장실 가는 척 은근슬쩍 나왔다.
팔십 킬로 규정 속도를 백이십 킬로로 달려서 집으로 갔다.
홈그라운드니 속도감시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는 훤히 꿰고 있다.
찌개다시를 다 먹을 때 쯤, 원위치로 돌아왔다.

사실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집에서 나갈 때, 책상 서랍에 넣어둔 지갑을 챙기기는 했다.
내 친구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항상 외출준비 가방을 싸둔다고 했다.
그 가방에다 필요한 건 다 넣어둔다는 거였다. 열쇠, 폰, 지갑, 화장품 등등.
나는 그게 안 된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의 ‘구두’처럼 나는 ‘가방’이다.
나갈 때마다 필이 꽂히는 가방이어야 하기에 내 친구처럼은 안 된다.
그래서 외출에서 돌아오면 가방의 모든 소지품을 제 자리에 갖다 둔다.  
나는 외출 할 때면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물론 웬만하면 SLR카메라를 가지고 가지만 남편하고 외출할 때는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갈 때가 많다.
남편은 내가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안하지만 내가 무언가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면 그런 표정이 얼굴에 묻어난다.
물론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쿨한’ 남편인척 더 좋은 카메라를 사라고도 한다.

내가 지갑이라고 가지고 간 게 바로 ‘똑딱이’ 카메라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남편은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지.’ 정도로 넘어갔다.
만약 알았으면 ‘좀 적당히 미쳐!’ 잔소리를 해댈 게 뻔하다.

이런 정열이라면 난 정말 좋은 ‘찍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순발력이 좋은 아줌마이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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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7-2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그라운드여서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중전님의 순발력이 아주 맘에 듭니다ㅋㅋㅋㅋㅋㅋ

gimssim 2010-07-23 22:42   좋아요 0 | URL
그래요. 홈 그라운드의 잇점이지요.
순발력이라... 이것도 위안이라 생각하고 넘어갑니다요.클클클...

꿈꾸는섬 2010-07-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실수를 바로잡는 순발력 정말 대단하십니다. 상대방을 난감하게 하지 않기 위한 중전님의 배려가 너무 예쁘세요.^^

gimssim 2010-07-24 07:12   좋아요 0 | URL
칭찬이지요? 고마워요.
난 아직 좀 더 자라야해. 칭찬을 먹고!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0-07-2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도 저렇게 물건을 구획나눠 고 자리에다 놓는걸 좋아하는데...
근데,저희 아들이 그걸 배워 너무 연연해 하는지라,
요즘은 다시 흐트러 놓으려고 합니다만~(,.)

저도 중전님이 맘에 듭니다.
순발력 좋은 '아줌마'셔서 더 맘에 듭니다~^^

gimssim 2010-07-24 07:14   좋아요 0 | URL
저도 나머지는 대충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책상을 제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라...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것 보다 때로 이런 실수도 얘깃거리가 되니,
그렇게 위안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