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속여먹기는 정말 일도 아니다

오늘 글은 ‘남편’ 분들에게 좀 죄송한 글이다.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지난 봄 이사를 하면서 삶의 군살을 좀 빼자고 결심을 했다.
짐을 좀 줄이자는 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천상병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어머니 심부름 하러 잠깐 왔다가 그 심부름이 끝나면 어머니께로 다시 돌아가는 삶이다.
그러니 마구 쌓아놓고 사는 삶은 절대 아니다.
군더더기를 줄이자면 버리기에 앞서 사는 것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내 사전에는 사는 것은 없다고.
그랬더니 부창부수라 남편은 ‘구입’하자로 단어를 바꿨다.
하는 수 없이 가끔 ‘구입’은 하고 산다.
그래도 약발이 있는지 무얼 사려면 남편은 나의 눈치를 조금은 본다.
그저께 아침에 남편이 말했다. “여보, 책 한권 구입하면 안 될까?”
‘안되기는? 나도 구입해야 할 책 있는데.’
이 말은 속으로 하고 정작 밖으로 한 말은
“또 무슨 책을?” 목소리를 한톤 높였다.

오늘 알라딘에서 책이 왔다. 바로 이것이다.  



<위험한 호기심>은 남편이 원한 책이고 거기 묻어서 구입한 내 책이 세 권이다.
물론 남편은 모른다.
남편은 아직도 왕성한 호기심의 소년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요즘 사진에 필이 꽂힌 나는 책의 편식이 심하다.
가끔 지적 영양 불균형을 우려해 자책해 보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너그럽게 넘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만간 페이퍼로 써볼 참이다.

또 한 가지, 남편은 잡곡을 많이 섞은 밥을 좋아하고 나는 흰쌀밥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잡곡밥이 건강에도 좋고 둘이 살면서 두 가지 밥을 해먹을 수가 없어서 내가 남편에게 맞춘다.
보리쌀, 현미, 율무, 찹쌀, 검정콩을 섞어서 밥을 하는 데 이 잡곡은 미리 물에 불려 놓아야 한다.
어쩌다 깜빡 잊고 미리 불려놓지 못하면 낭패다.
남편은 어쩌다 한 번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도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꼭 식탁에서 “밥이 왜 이래?” 라던지 “밥이 왜 흰색이야?”
한 번도 지적하지 않는 때가 없다.
정말 엄청 화난다.
처음에는 “응, 미리 불려놓는 걸 잊었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같은 사안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편은 같은 사안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꾀를 냈다.
잡곡을 미리 불려놓는 것을 잊었을 때는 검정 쌀을 한 찻숟가락 정도 섞어서 밥을 한다.
그러면 적당한 검정색이 된다.
잡곡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거무스름한 밥을 보고 남편은 너무 행복해 한다.

난 왜 이리 머리가 좋은 거얏!

그런데 교회에 가서 예수쟁이는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날은 마음이 좀 꿀꿀해진다.

*** 오늘은 토요일, ROTC 훈련을 마친 아들이 집으로 옵니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남편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있습니다.
어제 ‘멍멍’ 두 마리 잡고(아! 싫어라),
못 먹는 사람을 위해 삼계탕 열다섯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먹는 것에 별 취미 없는 저여서 좀 별로이지만
더운 여름 마누라 고생하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하는 바른생활 사나이는
친구들 먹이는 것에 많이 행복해 합니다.
그 많은 것, 준비하느라 땀을 엄청 쏟았지만...
‘행복’을 선택하는 건 어차피 자신의 몫이라 사료되어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님들도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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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4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님, 좋은 아침이에요.
ㅎㅎ 사는게 다 비슷하군요. 저도 남편에게 "사자"의 시옷도 얘기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러면서도 알라딘서 남편 커피 사준다는 핑계로 제 책을 살짝 끼워서 주문하지요.

[인상과 풍경]이 있군요. 저도 블랑카님 서재서 보고 [여명]을 이번 주말에 읽을 예정이에요. 중전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2010-07-2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gimssim 2010-07-24 22:21   좋아요 0 | URL
저도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보고 주문했어요.
가을까지 좀 집중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꾸 이렇게 엉뚱한 데로 외도를 합니다.
네 Manci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비로그인 2010-07-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질좋은 백미로 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밥이 최고입니다.
퓨어(pure)한 흰 밥에 뭔가 잡것을 넣으면 그 순간 흰 밥의 미묘하며 깊은 맛이 사라집니다. 진정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입맛이 까다로와서 흰 쌀밥에 콩을 넣으면 쓴 맛을 느낍니다.
찹쌀에도 역시 쓴 맛을 느낍니다.
보리는 거친 질감이 싫습니다.
조는 새가 먹는 것이란 선입견이 있고 거친 질감이 보리이상입니다.
수수는 진득거리고 깨물면 터지는 느낌이 정말 싫습니다.
현미는 푸르스름한 곰팡이 빛깔에 그 냄새가 정말 싫습니다.

잘 찧은 햅쌀로 지은 따스한 쌀밥에 바로 무친 생김치를 올려먹으면
최고지요!!


gimssim 2010-07-24 22:13   좋아요 0 | URL
남편은 흰쌀밥에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저는 더운 김이 술술 올라오는 금방 지은 흰쌀밥을 좋아하는데.
그걸 어떻게 먹느냐고, 절대 뜨거우면 안되요, 적당히 식은밥이라야.

근데 한사님, 정말 까다로운 입맛 맞네요.
우리 집에선 그러면 밥그릇 뺏기는 수가 있는데...ㅎㅎㅎ

stella.K 2010-07-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중전님도 참...지혜죠.
근데 부군과 좀 반대신 것 같네요.
잡곡밥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물론 가끔 쌀밥만 먹는 것도 맛있긴 한데
저희는 항상 잡곡밥을 먹고 사는지라 미끈하고 밋밋해서 그다지...
습관인 것 같아요.
장성한 아드님이 계셨네요. 지금쯤 만나셨을라나...?
반가우시겠어요.^^

gimssim 2010-07-24 22:16   좋아요 0 | URL
우리 부부는 정말 반대인 것이 많아요.
책으로 써도 한 권은 될 터이지요.
아들은 만났고 키가 185센티미터인데 훈련 받느라 몸무게가 73킬로로 왔네요.
집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하루 여섯끼씩 먹일 참이에요.

sslmo 2010-07-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연배가 위신 것 같아,이런 말씀 드리기가 외람되지만~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몬 데리고 산다는 속담이 중전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중전님과 함께 사시는 분이라면,그 분도 내공이 보통이 아닐 듯~^^

gimssim 2010-07-25 13:40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만만찮은 내공, 지조가 있다보니 때로 힘이 들 때도 많습니다.
서로가 좀 적당하면 좋을텐데 말이지요.

프레이야 2010-07-2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울 땐 주방에 있는 게 제일 고역이에요.
삼계탕 열다섯이요? 중전님, 삶의 내공을 언제 다 배울까요? 전.ㅎㅎ

gimssim 2010-07-24 22:22   좋아요 0 | URL
그전에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무서운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어요.
사람의 입하고 손이래요.
그 말씀이 맞아요.
멍멍 두마리, 삼계탕 열다섯 마리를 다 먹고, 치웠으니.
입과 손...맞지요?
프레이야님.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어요. 안닥치는 게 좋은 일이지만...ㅎㅎ

순오기 2010-07-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그렇게 많은 손님을 치루다니욧!
저도 광주에 처음 와선 남편 손님들 다 집으로 오게 했는데
애가 셋 되니까, 절대 오라는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점차 만남도 뜸해졌고... 지금은 남자들끼리만 애경사에 만나는 듯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바른생활'님께서 어깨는 좀 주물러주셨나 몰라요.^^

gimssim 2010-07-26 07:25   좋아요 0 | URL
흐흐흐...우리집 바른생활은 손님보내고,
설거지 마치고(집앞 학교 소나무숲에서 모임을 했어요)
집에 오니 비가 와서 분위기 된다며 우산 쓰고 산책을 가자고 하네요.
기어이 '지금이 산책갈 상황이냐?' 소리를 질렀어요.
그랬더니 그럼 지금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등산을 가자네요.
품위있는 '중전'은 물건너 가고 결국은 '싸움닭'이 되고 맙니다.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0-07-2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 잡곡 불리시느라 고생하시네요.
전 미리 몽땅 불려서 냉동실에 넣어놨어요. 누가 그리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밥 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쓰고 있어염.. ^^

언니, 동창회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여. 저는 엄두도 못 낼 일이예여~

gimssim 2010-07-26 21:44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근데 냉동실이 만땅이어서.
동창회는 정말 사람이 많아서 걱정 많이 했어요.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주셨지요.
등산모자 네 개 사서 하나씩 선물로 드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