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어느, 중년 남자의 두려움
며칠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서 읽고 있다.
한겨레신문 논설 주간을 지낸 김선주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이다.
그동안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나는 이이의 세상을 염려하는 따뜻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그 시선의 아랫자락에는 모성이라는 여성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이의 글이 이런저런 사회의 부조리나 문제점, 구조적인 모순, 제도적인 장치의 미비, 인간성의 상실, 인간에 대한 배려나 예의의 부재 등 많은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열심히 읽고 있는데, 남편은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면 무심한 척 하면서 마누라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알고 싶어서 슬쩍슬쩍 엿보곤 한다.
내 책상 위의 책들을 안보는 것처럼 하면서 제목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책을 왜 봐?”
남편은 자기의 관심 분야가 아니면 무식하기 그지없다. 아니 무식하다기 보다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보통 때는 그냥 넘어가는 데 아무래도 이 책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러면 책장을 들춰서 무슨 내용인가 슬쩍 보아도 될 터이지만 그런 수고는 절대 안하는 사람이다. 나는 남편이 말하는 뜻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 책이 왜?”
중년 남자는 중년의 여자가 느끼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아마 ‘젖은 낙엽 증후군’인 것 같다.
바다 건너서 온 용어이다. 일본에서 한때 유행하였고 지금도 이런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일본은 20년 이상 동거한 부부의 이혼 이른바 '황혼이혼'의 원산지이다. 전후 세대가 은퇴를 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서 퇴직 이후의 인생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은퇴한 50∼60대 남편들을 ‘누레오찌바’ 즉 ‘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다.
구두나 몸에 붙으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퇴직 후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빗댄 말로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으면서도 쓸모는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노부오 쿠로카와박사는 노년기 일본 주부의 60% 이상이 ‘은퇴 남편 증후군’(RHS: Retired Husband Syndrome)에 걸려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황혼이혼’이란 단어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 2363건에 불과했던 황혼이혼은 10년 후인 2000년 1만6978건으로 7배 넘게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2만8261건으로 10년 전보다 2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다.
전체 이혼건수에서 황혼이혼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높아져 1990년에는 전체 이혼 건수 가운데 5.2%에 불과했으나 10년 후인 2000년에는 14.2%로 급증한 뒤 2009년에는 22.8%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이혼부부 열 쌍 가운데 20년 이상을 같이 산 부부가 두 쌍을 넘은 셈이다.
남편들의 편에서 보면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부부동반으로 여고 동창들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남자들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인문계열, 이공계열 별로 공부를 하게 되고 따라서 졸업을 하고나서 하는 일들도 몇 가지에 국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자들은 물론 자신의 일을 따로 갖고 있긴 하지만 남편들의 직업에 따라 살아가는 환경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내 여고친구들의 남편들도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남편들끼리도 서로 알고 지내고 있다.
한 번 남편들을 대동하고 만났더니 웃기는 건, 이 남편들이 우리 모임을 너무 재미있어 한다는 거였다.
비용을 남자들 쪽에서 댈 테니 다음 번 모임에도 초대를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높였다.
“아, 됐거든.”
어느 강연에서 좀 슬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편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삼십 년을 넘게 하늘에 떠서 일을 하다가 마침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그렇게 홀가분하고 좋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가 않으니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아내의 친구 모임에 가게 되었다.
옆에서 가만히 들으니 아내의 친구는 자신의 집안일이나 아이들 일을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
자신은 생전 처음 듣는 일인데 아내의 친구는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남편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우스개 소리로 요즘 남편은 이사할 때 절대 애완견을 품에서 내려놓지 않는다고 한다.
애완견에 묻어서 기어이 이사 가는 집에 입성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의 현주소이라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우리 남편도 이런 대열에서 예외가 아닐 터이다.
그래서 아내의 책상 위에 있는 책의 제목을 보고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이 마누라가 나 몰래 이별을 꿈 꾸고 있나’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먹기에는 좀 많은 양의 미역국을 끓인 적이 있었다.
남편이 그것을 보더니 큰 눈이 더 커지며
“미역국을 왜 그렇게 많이 끓여?”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남편의 염려를 눈치채지 못하고 심상하게 대답했었다.
“먹을려고.”
물론 이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이별이야기가 맞다.
앞부분에서 연예인 부부의 이별, 미국 갑부 부부의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철새정치인에 관해서였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꾀하는 바가 다른 정치 집단의 이합집산은 당연한 것이’지만 ‘직업과 학문, 예술에의 열정, 나라와 겨레, 어떤 이상, 사회적 이슈에 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했던 터질 것 같은 순간’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정치권의 세태를 통탄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남편은 유교적인 집안의 장손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남존여비’ ‘부부유별’ ‘여필종부’ 따위의 풍속을 가문의 영광처럼 지키는 사람이다.
지금도 내가 무어라고 한 마디 할라치면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똑똑하자’고 입에 거품을 문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다는 것이다.
그런 간 큰 남자가 언제 이렇게 ‘새가슴’ 되었는지 모르겠다.
당신과 절대 찢어지지 않은 테니 안심하라는 각서라도 한 장 써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