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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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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슈퍼자본주의(이하, 슈퍼)]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읽으시던 책 중 하나로 회자된 적이 있는 책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어서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출간된 지 좀 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첫 대출자였습니다. (저도 대학생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지적 관심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지적 관심이라도 있는지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과연 나는 시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혹은 투자자와 소비자로서의 입장을 더 중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착한 소비에 대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라 마트를 끊어보려고 시도한지는 거의 1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으며 꽤나 성공적으로 마트를 끊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적어도 밤에 심심하면 아기들 데리고 가던 습관은 이미 벗어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동네시장을 찾을 만큼의 용기(!)는 없습니다. (물론, 마트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동네시장의 물건은 도대체 저 야채가, 저 생선이, 저 고기가 어디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3의 대안으로 생협 - 저희 가족은 한살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 을 가고 있긴 하지만...

저자는 1970년대 이전의 미국 사회를, 과점 체제에서 비롯된 고용안정으로 인해 중산층이 두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비록 생산의 효율성이라든지 제품의 혁신적 개선 같은 것은 별로 없는 맥빠진(!) 시대였지만, 대신에 기업은 과점 체제 덕택에 소비자들의 소비량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기업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노동자의 스트라이크를 방지함으로써 안정적인 생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종차별 문제라든지 매카시즘의 광풍 등의 사상적 차별만 없었다면 완전히 황금시대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의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던 시대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런 덕택에 소비자와 투자자는 큰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과점 체제 아래에서, 소비자는 큰 변화 없이 늘상 보이는 물품을 사야했고, 투자자는 자신들보다 노동자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경영진들 때문에 막대한 배당금을 받을 기회 따위는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냉전시대에 국가의 지원에 의해 군비 증강을 위한 무기 개발에 여러 연구들을 하던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개발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경제체제는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터넷의 발달은 소비자의 다양한 needs에 귀 기울이게 하면서 한 가지 물품을 그냥 줄기차게 - 안정적이지만 변화와는 무관한 - 생산하던 과점 기업들을 당황에 빠뜨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기술력의 성장으로 공장은 컴퓨터의 발달에 기인한 생산의 기계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과점 기업의 안정성에 대응할 수 없었던 소·중규모의 기업이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결국 생산자는 치열한 가격 전쟁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윤리적 기업, 착한 기업 따위는 가격 전쟁 아래에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업은 고용인을 조금 더 쥐어 짜더라도, 조금 더 비윤리적인 방식/형태의 물품을 팔게 되더라도, 착한 가격을 만드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는 냉정하게 돌아서니까요. 그러면서 기업은 투자자의 투자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투자자가 뭉쳐서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댓가를 받아내길 원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제 ‘슈퍼 자본주의’가 도래했음을 알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소비자/투자자’와 ‘시민’의 역할 사이에는 갈등이 벌어집니다. 작은 임금과 불충분한 사회보장제도로 고용인을 싸게 부려먹고(!),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물건을 팔기도 하는 기업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시민’과, 그런 기업의 행동을 통해 더 저렴한 물건을 사고, 더 나은 이득을 취하는 ‘소비자/투자자’의 갈등... 문제는 갈등의 두 주체인 ‘시민’과 ‘소비자/투자자’가 실은 두 주체가 아니라 한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기업에게는 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기업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더 나은 이익을 내고, 더 저렴한 물건을 팔기 위해 다만 자본주의적 본성에 충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성이 무노조경영을 하고 불법 경영권 승계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칠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로비를 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더 저렴한 물건을 만들고 더 나은 이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준다면 실은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책을 읽으면서, 본질적 문제이자 해결책은 시민이자, 동시에 투자자이며 소비자이기도 한 저에게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법인세를 폐지하고 회사에 대한 소송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인세 대신에 투자에 대한 이익을 얻어가는 투자자의 이익금에 세금을 물리고,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불매운동 따위를 벌일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법체계 아래에서는 법인도 행위주체이긴 하지만) 여러 기업의 행위가 기업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업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인데, 즉 기업의 행위와 그에 대한 책임은 기업 경영인/투자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체계로는 돈은 개인이 벌고 책임은 기업이 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 기업의 광범위한 로비 행위에 대한 비용은 기업에서 나가지만, 그 기업이 얻는 이익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일 수 밖에 없겠지요. 더 나아가, 불매운동을 해봐야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도덕적인 경영을 해야 할 의무는 사실상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에게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한다고 - 불매운동 따위로 - 하더라도 기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한 집단이므로 그것을 굳이 해야 할 의무도 해야 할 책임도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룰을 만드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시민’과 ‘소비자/투자자’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에 품고 있는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집니다. 페어플레이를 위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데, 당신은 동의할 것인가? 비록 당신이 향유하는 ‘소비자/투자자’로서의 이익이 조금 - 혹은 조금 많이 - 줄어들더라도 상관없는가?

저자는 ‘슈퍼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슈퍼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슈퍼자본주의 시대에 닥친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하나에 다른 하나가 종속된 것이 아니라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어야 한다는 것을 책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자가 후기에도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기업이 눈먼 돈을 마구 날려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로비스트를 통해 국가 - 의회 - 로부터 구매하는 데에는 조금 더 깨끗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질서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수행하는 데에는 조금 더 지나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니, 얼마 전에 그 로비로 뜨겁게 나라를 달구다가 이제 흐지부지 된 삼성 로비 사건 같은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 로비스트는 없지만 로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훨씬 많은 것이므로 실은 더 문제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수천억 로비는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도 못하는 검찰이, 600만불 로비 - 진짜 로비인지 알 수도 없는 - 에 대해서는 불충분한 증거를 충분하게 만드느라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서거하신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슬프고 분한 마음만 앞서게 되네요)

지난 총선 때의 뉴타운 광풍, 부패한 세력이 무능한 세력보다 낫다는 표현,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도덕적 해이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말들... 클린턴의 표현을 빌어 제 독후 감상을 마치려 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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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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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저는 미네르바라는 분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파일은 가지고 있지만... 하도 여러 글들에서 그 분의 글에 대한 분석들을 보다보니까,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막상 읽어보려고 마음을 먹게 되지는 않네요.

그래도 미네르바 님이 추천하셨다는 책들은 메모해두었습니다. 그 중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한 번 다 읽었습니다.

일단, 요즘 제가 (정치)경제학 쪽의 책을 이런 저런 것들 읽어가다보니까, 책 자체가 아주 새롭게 읽혀지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흑사병 같은 경제 외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것과,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인클로저 운동 등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 바입니다. 거기에 뜨거운 불길을 끼얹은 것이 산업혁명이며, 그 전초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상업혁명이기도 합니다.


뭐 그럭저럭 요약하는 것은 별다른 독후감상문이 되지 못할 터이니.

일단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은, 1930년대 한창 대공황의 파고를 건너넘던 시기의 미국 사회를 시간적 배경으로 쓰여진 책 치고는, 지금 읽어도 심정적으로 시차를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의 충격입니다. 책 p190 에 이런 문구가 있네요.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정말이지 출생의 특권은 폐지됐지만 사업의 특권이 그것을 대신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귀족과 교회 세력이 그 자리를 내어준 이후에, 부르주아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을 저자는 위와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신분의 특권은 없어진 대신, 그 특권은 돈을 가진 이들에게로 옮겨갔죠. 이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부(富)가 부(富)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인 근 220여년 전에도, 뉴딜 시기인 80여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몇천억씩 해먹어도 휠체어 끌고 유유히 법정에서 무죄 판결 받고 유유히 사라지는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유명한 탈옥수 모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죠.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책은 급격하게 자본주의로 대체되는 사회가, 실은 봉건주의의 어두움보다 더 큰 어두움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 보통 이런 부류의 책들은 선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류의 이야기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선동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언외언을 짚어보면 선동적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느낌만이 전부가 아닌 까닭은, 저자가 진중한 자세로 담담한 어조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경제현상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글이 주는 선동적인 느낌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의도라기 보다는, 그냥 현실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겠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알고 있는 이야기가 꽤나 있음에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히 자본주의의 주인인 자본가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저자는 자본가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제시하고 있으며, 설득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심정적으로 무산자에 가까와서 그런지, 아니면 저자의 언외언 때문인지, 그런 설득에 설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감정적으로 흘렀는데... 이 책은 대공황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던 시기 - 독일 등은 파시즘의 방식으로, 미국 등은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 의 여러 움직임들을 편들지 않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당시로서는 최신의 경제학자 이론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그 속에서 저자의 언외언을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만, 저자는 정말 담담하고 진중하게 모두의 입장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히, 케인즈나 하이예크 같은 이들의 이름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독서 중에 맛볼 수 있는 기쁜 손님 같습니다.

결국, 세계대공황이 80년 만에 다시 이 땅을 찾은 작금의 현실에서 지금 이 책을 읽어보는 분이 계시다면, 80년의 시간적 격차 따위는 무시무시한 대공황이라는 공통점 앞에서 촌음의 시각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80년의 격차는 격차일 뿐입니다. 케인즈 이론에 기반한 복지국가이론이라든지,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등의 경제 상황이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최신 현상들을 머릿속에서 지운다면 정말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가와 화폐가치 변동에 대하여는, 올해 MB정부에서 어설프게 주장했던 환율주권론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서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를, 상업혁명 당시의 화폐발행 상황에 비추어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소위 '낙수 효과'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하루에 열 몇 시간 씩 - 저도 (소위) 대기업을 다니면서 8시 출근에 8시 퇴근을 밥먹듯이 해도 고작 받은 임금은 하루 9시간 분 뿐이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자그마치 화이트 칼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열 몇 시간 노동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일하면서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했던 - 저는 그래도 나름 넉넉하게 받았습니다만... - 사람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물어보고 싶네요. 책의 p230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산업혁명 시대에 소위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라고 일컬어지던 영국 국교회의 부주교 페일리라는 이의 말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개선만이 바람직한 변화다. (중략) 그리고 산업이 성공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룩된다. (중략) 공공질서와 평온 속에서는 (중략) 이것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상황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중략) 부자들의 지위나 재산을 탐하는 것, 그것들을 폭력이나 공공연한 소동과 혼란을 통해 탈취하고 싶어할 정도로 탐하는 것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꿈꾸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영국의 노동자들도 받을까봐 지레 겁먹은 부주교의 언급이었다고 하죠. 그러나, 저 말 속에서 우리는 (소위) 가진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에서 상위 2%를 옹호하는 의미의 대표격인 '낙수 효과'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임금 상승은 대개 탄압에 부딪히는 의식적인 대중 행동으로'만 '획득'(p 132)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코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얻은 이윤 -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잉여노동시간으로 낳은 잉여 가치 - 은 결코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저자는 C(총자본)=c(불변자본)+v(가변자본) 의 공식으로 알기 쉽게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R&D, 시설 증설 등으로 끊임없이 증가하는 불변자본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나마 줄이기 쉬운) 또 다른 불변자본인 임금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개발하겠죠. 작금의 비정규직 문제가 독서 중에 오버랩되었습니다.


네. 이 책은 진중하고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현상을 분석하지만, 읽고 나면 '납득'되어 버립니다.

서가에 한 권 정도 가지고 있다면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책이고, 글의 말미 부분은 1930년대의 대공황 당시의 여러 이론들을 잘 요약하고 있으며, 이 공황의 끝은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측도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 현상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기본 용어나 개념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친절한 책이기도 합니다.

짧게 쓰지 않을까 했는데 글이 두서없고 공격적이며, 길어졌습니다. :D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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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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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사in 의 소개글을 읽고 무작정 사버렸습니다. :) 실은, 얼마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정태인 氏 인터뷰를 읽고 나서, 읽고 있던 '대한민국 개조론'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신자유주의가 뭔지 조금 알아야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마침 장하준 교수의 책을 소개받은 것이죠. 물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대척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 일단 간접경험도 경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책을 집었습니다.
 
한 번 읽고나서 사실 좀 몽롱한 느낌도 들지만 - 경제에 문외한인 제게는 좀 어렵더라구요 -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간단하게 나열해보면.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여섯 살난 아들을 예로 들어 하는 이야기가 일단 좀 강력했죠. 여섯 살난 아들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관점에서는 아들을 노동 시장으로 내보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을 통해서만 경쟁력을 획득하고 결국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에게 강요(!)하는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공정한(!!) 싸움을 의도하는 것인데, 과연 (상대적으로) 여섯 살난 아이에게 그런 공정한 싸움의 룰을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공정한 룰로 싸우지 않고 약간의 어드벤티지를 안고서 이 험한 세계 산업 시장에서 싸워야하는 개도국의 입장인가에 대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시민 의원이 쓴 대한민국 개조론에는 - 다 읽지는 못하였지만 - 우리나라는 GNP가 이미 2만달러에 - 비록 달러화의 약세에 기인한 측면이 강하지만 - 육박하고 있는데, 약간의 불리함이 있더라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을 믿고 확 뛰어들어야한다, 라는 이야기에도 어느정도 감정적으로 수긍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일단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재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이어 읽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이야기를 하면서 더 자세하게 하고 싶은데, 일단 간단하게 언급하면, 장하준 교수는 재벌이라는 존재가, 중공업 산업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존재였다는 이야기를 통해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에서의 재벌의 역할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의하면, 모든 국가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산업 분야를 키우는 것이 시장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것은 실은 언어도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개도국 혹은 후진국은 비용대비 생산성이 월등한 제조업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제조업이라는 분야는 뿌린대로 당장 거둘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초반에 수익 없는 자본이 많이 투입되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이나 싫어하는 공기업 구조를 통해 초기 투자를 감행하거나, 혹은 민간 기업 중에서 초기 자본을 때려부어도 망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진 기업 - 재벌 - 이 개도국 혹은 후진국의 중화학 제조업의 육성에 기여하면서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벌이 지닌 폐혜 때문에 재벌의 순기능까지 폄훼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당히 공감이 갔고, 저 또한 재벌이 지닌 단어 의미의 선입견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부분에 대해서는 재벌의 순기능과 폐혜를 분리해보게 되었습니다.
 

지적재산권의 부분에서도, 선진국 -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 들이 지적재산권 분야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 지적재산권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기술집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며, 지적재산권이야말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흘러가면서 일방향적인 권리 의무 - 의무라면 주로 로열티를 의미하겠죠 - 관계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후진국과 개도국에게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AIDS 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데, 아프리카의 많은 죽어가는 에이즈 보균자의 치료를 위해서, 선진국은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을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인권을 위해서 저렴한 가격에 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지적재산권 분야의 강화가 결국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무장되면서 선진국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장하준 교수는 강조하고 있죠.

저도 법전공한 처지라, 막연한 의미에서 지적재산권은 지켜져야하는 것이라는 법치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지적재산권이란 것이 산업 분야에서 선진국이 개도국 혹은 후진국을 압박할 수 있는 장치로 악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막연한 부분을 상당부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그 이외에도 IMF 가 우리나라에 강요했던 재정건전성이라든지 부채비율의 과도한 축소 강요 등이 지닌 신자유주의의 이중 잣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한 편이라기보다는 반대편이라는 이야기들 같은 것들을 통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의 논거도 읽어봐야겠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현재까지는 유치산업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명백하다면, 분명히 FTA 는 재고해야할 사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아직까지는 더 알아가는 단계니까,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아무튼, 이 책 이후로 '쾌도난마 한국경제' 를 하루만에 다 읽었으니, 그 책에 대한 이야기도 바로 해볼까 합니다. :)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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