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슈퍼자본주의(이하, 슈퍼)]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읽으시던 책 중 하나로 회자된 적이 있는 책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어서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출간된 지 좀 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첫 대출자였습니다. (저도 대학생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지적 관심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지적 관심이라도 있는지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과연 나는 시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혹은 투자자와 소비자로서의 입장을 더 중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착한 소비에 대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라 마트를 끊어보려고 시도한지는 거의 1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으며 꽤나 성공적으로 마트를 끊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적어도 밤에 심심하면 아기들 데리고 가던 습관은 이미 벗어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동네시장을 찾을 만큼의 용기(!)는 없습니다. (물론, 마트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동네시장의 물건은 도대체 저 야채가, 저 생선이, 저 고기가 어디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3의 대안으로 생협 - 저희 가족은 한살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 을 가고 있긴 하지만...

저자는 1970년대 이전의 미국 사회를, 과점 체제에서 비롯된 고용안정으로 인해 중산층이 두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비록 생산의 효율성이라든지 제품의 혁신적 개선 같은 것은 별로 없는 맥빠진(!) 시대였지만, 대신에 기업은 과점 체제 덕택에 소비자들의 소비량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기업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노동자의 스트라이크를 방지함으로써 안정적인 생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종차별 문제라든지 매카시즘의 광풍 등의 사상적 차별만 없었다면 완전히 황금시대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의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던 시대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런 덕택에 소비자와 투자자는 큰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과점 체제 아래에서, 소비자는 큰 변화 없이 늘상 보이는 물품을 사야했고, 투자자는 자신들보다 노동자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경영진들 때문에 막대한 배당금을 받을 기회 따위는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냉전시대에 국가의 지원에 의해 군비 증강을 위한 무기 개발에 여러 연구들을 하던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개발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경제체제는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터넷의 발달은 소비자의 다양한 needs에 귀 기울이게 하면서 한 가지 물품을 그냥 줄기차게 - 안정적이지만 변화와는 무관한 - 생산하던 과점 기업들을 당황에 빠뜨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기술력의 성장으로 공장은 컴퓨터의 발달에 기인한 생산의 기계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과점 기업의 안정성에 대응할 수 없었던 소·중규모의 기업이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결국 생산자는 치열한 가격 전쟁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윤리적 기업, 착한 기업 따위는 가격 전쟁 아래에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업은 고용인을 조금 더 쥐어 짜더라도, 조금 더 비윤리적인 방식/형태의 물품을 팔게 되더라도, 착한 가격을 만드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는 냉정하게 돌아서니까요. 그러면서 기업은 투자자의 투자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투자자가 뭉쳐서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댓가를 받아내길 원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제 ‘슈퍼 자본주의’가 도래했음을 알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소비자/투자자’와 ‘시민’의 역할 사이에는 갈등이 벌어집니다. 작은 임금과 불충분한 사회보장제도로 고용인을 싸게 부려먹고(!),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물건을 팔기도 하는 기업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시민’과, 그런 기업의 행동을 통해 더 저렴한 물건을 사고, 더 나은 이득을 취하는 ‘소비자/투자자’의 갈등... 문제는 갈등의 두 주체인 ‘시민’과 ‘소비자/투자자’가 실은 두 주체가 아니라 한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기업에게는 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기업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더 나은 이익을 내고, 더 저렴한 물건을 팔기 위해 다만 자본주의적 본성에 충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성이 무노조경영을 하고 불법 경영권 승계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칠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로비를 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더 저렴한 물건을 만들고 더 나은 이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준다면 실은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책을 읽으면서, 본질적 문제이자 해결책은 시민이자, 동시에 투자자이며 소비자이기도 한 저에게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법인세를 폐지하고 회사에 대한 소송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인세 대신에 투자에 대한 이익을 얻어가는 투자자의 이익금에 세금을 물리고,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불매운동 따위를 벌일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법체계 아래에서는 법인도 행위주체이긴 하지만) 여러 기업의 행위가 기업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업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인데, 즉 기업의 행위와 그에 대한 책임은 기업 경영인/투자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체계로는 돈은 개인이 벌고 책임은 기업이 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 기업의 광범위한 로비 행위에 대한 비용은 기업에서 나가지만, 그 기업이 얻는 이익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일 수 밖에 없겠지요. 더 나아가, 불매운동을 해봐야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도덕적인 경영을 해야 할 의무는 사실상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에게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한다고 - 불매운동 따위로 - 하더라도 기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한 집단이므로 그것을 굳이 해야 할 의무도 해야 할 책임도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룰을 만드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시민’과 ‘소비자/투자자’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에 품고 있는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집니다. 페어플레이를 위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데, 당신은 동의할 것인가? 비록 당신이 향유하는 ‘소비자/투자자’로서의 이익이 조금 - 혹은 조금 많이 - 줄어들더라도 상관없는가?

저자는 ‘슈퍼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슈퍼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슈퍼자본주의 시대에 닥친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하나에 다른 하나가 종속된 것이 아니라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어야 한다는 것을 책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자가 후기에도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기업이 눈먼 돈을 마구 날려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로비스트를 통해 국가 - 의회 - 로부터 구매하는 데에는 조금 더 깨끗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질서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수행하는 데에는 조금 더 지나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니, 얼마 전에 그 로비로 뜨겁게 나라를 달구다가 이제 흐지부지 된 삼성 로비 사건 같은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 로비스트는 없지만 로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훨씬 많은 것이므로 실은 더 문제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수천억 로비는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도 못하는 검찰이, 600만불 로비 - 진짜 로비인지 알 수도 없는 - 에 대해서는 불충분한 증거를 충분하게 만드느라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서거하신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슬프고 분한 마음만 앞서게 되네요)

지난 총선 때의 뉴타운 광풍, 부패한 세력이 무능한 세력보다 낫다는 표현,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도덕적 해이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말들... 클린턴의 표현을 빌어 제 독후 감상을 마치려 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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