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러한 정경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짐승이 새끼를 품듯 감상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본능적인 애정으로 목이 메이면서도 가끔 아이에 대해 이상할 만큼 차가워지는 자신에 당황하곤 했다.아이가 차츰 우리를 배반해갈 동안 우리는 아이로 인해 다투고 절망하고 화해하게 되리라. - P191
정옥이 아이를 이처럼 남의 아이 보듯 멀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짧은 반바지에 깃 없는 셔츠를 입고 무구하게 뛰노는 아이는 누구인가. 배태하기 전부터 그토록 자주 꿈속에서, 욕망 속에서, 사유 속에서 만나던 아이인가.정옥은 아이를 갖기 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나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았다. 마음속에 어떤 특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배를 빌려 태어날 아이는, 미래로부터 그녀에게로 냉담히 또는 팔 벌리고 즐겁게 달려오는 아이들 중 그 누구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나의 아이는 누구인가. - P225
나는 줄곧 내게 힘은 사라지고 헛된 정열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사랑인가, 성인가, 소멸인가를 자문하곤 했다. 대답은 모두일 수도, 전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부인은 얼마나 행복할 거냐고 사람들이 퍽 부러워해요. 나는 이웃집 여자의 말투를 흉내내어 중얼거렸다. - P163
앞으로의 모든 날들이 그러할 것이다.내 앞에 놓인 끝없는 시간들이, 전혀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체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그 지루한 나날들이 함성이 되어 숲을 흔들었다. 나는 문득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듯 아이와 남편을 먼눈으로 보는 자신에 공포를 느꼈다. 아이의 팔목에 매달린 풍선이 둥실 떠서 흔들렸다. 나는 갑작스런 두려움으로 아이의 팔에서 풍선을 떼어내었다. 그것은 춤추듯 흔들리며 날아가 이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 P169
이런 문장들~!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분가루처럼 엷게 떨어져내리는 햇빛뿐이었다.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입안쪽의 살처럼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내 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내 몸 가득 따뜻한 서러움이 차올라 해면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잠깐 물에 스치듯 꽁지를 담갔다 뺀 순간이었을까.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햇빛이 사위었다는 것뿐. - P50
인생이란…….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 P97
동네 뒤터에 천막을 친 서커스단에서 종일 떠들어대던 풍각쟁이, 만담가도 쉴 참인 저녁답이라 가끔 땅거미를 재우며 스쳐가는 바람 소리뿐, 사위는 조용했다. - P107
나는 다시금 소설책 읽기에 몰두했고, 퇴근 후면 그 무렵 발견한 조용한 찻집에서 한잔의 차를 시키고 상업학교 졸업, 경리 직원 2년 경력의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창밖의 풍경처럼 쓸쓸히 내다보며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이란 다만 비바람 치는 날 손안에 간직한 찻잔의 온기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찻잔이 싸늘히 식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 P117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때리는 거지? 왜 내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그녀는 댓돌에 앉은 채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나는 아픈 엄마를 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나는 엄마를 땅에 묻어주지 못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엄마가 벤치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 없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지쳐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등지고서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도 엄마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 P134
그때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측량할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그 순진무구한 사랑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차츰 빛을 잃어갔고, 그 자리는 현실적인 크기의 희망으로 대체됐다.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158
김소연 시인의 시는 나에겐 아직 어렵고, 유희경 시인의 발문의 프레드릭(잠잠이)는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