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0호 <대학> 중 신현아의 [대학이 해방구가 될 때]나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대학원에 진학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노동자가 되어 대학을 다시 마주했다. 멋없게 네모난 건물들 사이를 채우고 있던 것은 소문과 음모뿐 아니라 수많은 노동들이었다. 연구실이나 대기실이 없어 배회하는 시간강사들, 건물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지만 노동자로 분류되지도 않는 장학 조교들, 계단 아래 쪽방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곳에서 쉬어야 하는 청소 노동자들, 지하 2층 전기실의 설비 노동자들이 있었다.처음으로 교양 강의를 받아 강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벅차고 기뻤는지를 떠올려 본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니 장하다며 친구들과 가족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그것이 6개월짜리 계약직 삶의 신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다 같이 기뻐 할 수 있었을까. 그 삶의 시작을 알려 준 것은 대학의 취업 지원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신현아 씨 졸업하신 지 좀 되었는데 아직 취업 안 하셨나요?""네? 저는 지금 바로 이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데요?"졸업생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취업 현황 조사였다. 나는 그날도 같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강사는 4대 보험을 지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취업자에서 누락되어 있었다. 나는 일하고 있어도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전화를 건 사람은 최저 시금을 받으며 일하는 조교였다. 월급 조교로 일하는 친구는 학과 행정 업무 외에도 졸업생들에게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며 취업 여부를 파악해 매달 새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강의 노동은 그 대가가 철저히 ‘강의 시간만을 노동 시간으로 계산하여 시급으로 책정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아닌 일들이 따라붙는다. 새로운 강의를 개발해도 개발에 들어간 시간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개발한 강의는 정규직 교수의 것이 되며 강사 배정 역시 정규직 교수의 권한이다. 강사는 강의를 만들고 연구하고 실행하지만 그 강의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수강생들의 과제와 시험 채점도 강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기에 당연히 시급에 산정되지 않는다. 그 외에 학술대회를 열고 장소를 대여하고 학회지를 편집하고 논문을 수합하고 심사위원을 섭외하는 등‘학계‘를 움직이기 위한 수많은 일들 또한 노동이 아니었다.나는 몇 명의 정규직과 수많은 비정규직 및 하청 노동자들이 벌처럼 움직여 유지되는 이 대학이 어떤 곳인지 새로이 깨달았다. 대학이 매혹적인 공간이라고 여겼던 것은 나의 착각이자 짝사랑이었다. 노동자로서 다시 마주한 대학은 잔인한 공간이었다.
최영건 작가의 단편집 <수초 수조> 중 [감과 비]노년이란. 나이듦이란.
"아빠." 내가 말한다. "나무 좀 봐요.""나무가 뭐?""아픈가 봐요." 내가 말한다. 통"수양버들이잖아." 아빠가 목을 가다듬는다. - P11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P17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나를끌어당겨 풀밭에 다시 안전하게 올려놓은 다음 혼자 내려간다. 양동이가 옆으로 잠시 떴다가 가라앉아서 꿀꺽꿀꺽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물을 삼키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들어 올려진다. - P30
"오, 경고사격이군!""잘 들으라고.""누구 지갑이 가벼워지고 있는지 알겠네.""내가 따고 있어." 킨셀라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끝났을 때도 내가 따고 있을 거야."그때 왜인지 모르지만 당나귀 케이시 아저씨가 히힝 웃었고, 그래서 내가 웃었다. 그러자 다들 웃기 시작했고 어떤 아저씨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웃음 참기대결이야, 카드 게임이야?" 그때 당나귀 케이시 아저씨가한 번 더 웃었고, 다들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P48
킨셀라 아저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더니 나에게 뭔가를 건넨다. "그걸로 초코아이스 하나 사면 되겠네."내가 손을 펴고 1파운드 지폐를 빤히 본다."이 돈이면 초코아이스 여섯 개는 사겠는데?" 아주머니가 말한다."아, 애는 원래 오냐오냐하는 거지."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 P52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 P73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 P73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 P96
<채근담> 중 [근심과 기쁨, 안정과 어려움은 잠깐이다]현재의 환경과 처지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미래를 보며 나아가라!
문호영의 글. 진은영 시인의 시 [달팽이] 영어번역에 대한 이야기.
문호영 - 번역을 교환하는 놀이터영어로 쓰인 이 소개를 <초과>에 참여하는 번역가 중 한 명인 류승경은 이렇게 옮겼다.하나만 있으면 그 하나가 모든 게 되어야 한다. 다른 번역의 존재는 번역가를 조금 더 과감하게, 조금 더뻔뻔하게 만들어 준다. 번역은 이렇게만 해야 하는게 아니라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번역이 늘어날수록 번역가의 놀이터도 넓어진다. - P150
그래서 내 번역이 실렸다는 이메일이 도착했을 때 날아갈 듯 기뻤다. 재빨리 PDF를 열어 보니 편집장은 첫 호에 선정된 번역시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지옥도에서 자리 하나를 꿰차기위해 경쟁하기보다는 짐을 나눠 들 수 있도록, 투고된 - P153
번역문 열 개 모두를 실었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그간 내가 상상했던 ‘성취’가 단숨에 증발하는 순간이었다.나는 어쩌면 익숙한 위계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번역이 《초과》에 실린다면 그건 누군가의 글보다는 내 번역이 어떤 의미에서든 월등해서, 어떤 기준을 통과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편집장의 소개문은 번역에 정답이 없으며,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우열을 따질 필요도 없다는 걸 명백하게 밝혔다. ‘짐을 나눠 들자’라는 문장은 우리 모두가 번역한 「달팽이」의 가장 까다로운 구절인 "집이 아니야 짐이야"를 향한 윙크이자, 번역이 하나만 있을 때 느끼게 되는 막중한 책임감과는 다른 태도로 번역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1호 서문은 웹진의 이름에 걸맞게 ‘적당한‘, 또는‘알맞은‘ 번역으로 갈무리되지 않는 모든 시도를 향한 초대였다. - P154
《초과》를 읽으면서 나는 번역가들의 선택이 각각의 번역시라는 세계를 직조하는 방식에 감탄했다. 중영문학번역가 제레미 티앙은 번역가를 두 언어나 문화 사이의 ‘다리’로 비유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원문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번역하기에, 번역가는 다리처럼 중립적인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리라는 오래된 비유 대신 티앙은 번역가를 곡을 해석하는 피아니스트에 빗댄다. - P156
독자가 어떤 즐거움을 얻는지는 모호하다. 새로운 콘텐츠? 읽는 쾌락?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독자를 고려하며 작업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나는 읽히기 위해 출판을 한다. 그것이 내가 출판에 - P160
매료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페이지를 최대한 밀도 높고 최대한 넘기기 쉽게 만든다. 그러나 일단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후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갈 권리가 있다고 본다. 독자를 소비자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독자는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의 취향을 맞춰 주는 문학은 저하된 문학이다. 내 목표는 평소와 같은 기대를 낙담시키고 새로운 기대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 P161
눈앞의 제한으로 인해 잊히곤 하는 욕망을 상기시키는 이 질문은 《초과》가 번역가들에게 보내는 초대, ‘하나만이 존재할 때 지게 되는 짐‘을 내려놓고 각자의 해석을 펼쳐 보자는 제안과 공명한다. 동료들과 서로의첫 독자가 되어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각자가 원문의 어떤 요소에 주목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당연히 여겼는지 깨닫게 된다. 나는 후자로부터 특히 많은 것을 배운다. 당연시했던 것은 ‘달리 해석하고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기 때문이다. - P162
김예찬 - 잃어버린 시민을 찾아서모두가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는 관심 경제 시대에 대중의 관심을 잃은 시민사회단체는 점차 참여와 후원이 감소한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주로 언론을통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알려졌고, 이를 통해 후원회원으로 가입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이 시민사회단체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떤 이슈에 대해기자회견을 열거나 보도자료를 배포하면 언론 기사가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이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구성한 피드에 올라오지 않는 기사를 찾아 읽지 않고, 기사 제목만 읽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다. 신문 기사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을 알리는 일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온라인 서명 캠페 - P174
인, 뉴스레터, 심지어 전화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의 연락처를 확보하고 회원을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해야 겨우 기존 조직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 활동가들이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단체는 재정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175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폭력 피소 사실이 알려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와 함께 활동했던 선배 세대 활동가 상당수가 개인적인 추모 뜻을 밝혔고, 후배 세대 활동가들은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문제는 추모가 공적인 행위가 되면서 불거졌다. 장례위원회 참여 문제, 추모 성명 발표, 추모 현수막 게시 등을 두고 단체마다 갑론을박이 있었고, 이로 인한 갈등이 때로는 사건 자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많은 단체에서 이러한 갈등이 충분한 토론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서로 이야기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봉합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선배 세대 활동가끼리, 후배 세대 활동가끼리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 그쳤다.나 역시 SNS에서 이 주제에 관련해 조용히 ‘팔로우 취소’를 누르거나 술자리에서 화제를 돌리는 일들이 많았다.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각자가 구독하는 피드가 세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 역시 부족화 현상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 P178
구기연 - 인스타스토리로 연대하기하지만 시민들은 한밤중에 VPN을 이용해 해외의 디아스포라 미디어에 끊임없이 자신들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 이란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영상과 함께 촬영자의 울음과 분노의 목소리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2009년 녹색운동 이후부터 이란 국민들은 위성 미디어를 통해 ‘연대하는 신체들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검열을 피해 가려는 미디어가 거리의 신체들을 보다 주체적으로 만들어 내며, "지역 거리의 현장들은 미디어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시공간을 재현해 낼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미디어는 거리의 현장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그 사건과 행동의 일부가 될 때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란의 소셜미디어는 단순한 전달자를 넘어 글로벌 연대성을 끌어내는 정치력을 갖게 되며, 미디어로 매개된 정치로 중요성을 갖는다. -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