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맞아요.」 나는 랠프에게 아주 고마워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다이애나의 집에서 제대로 된 책을 읽었음에도 이때 생각나는 책들은 오로지 음란한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익명>이라는. - P497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도 내가 한순간이라도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베스트 부인 집의 내 방에 틀어박혀 불행을 곱씹으며 너무나 오랜 시간을 비참하게 보냈다. 나는 벽지처럼 희망과 색깔이 탈색되었다. 그러나 내가 흐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런던은 절대 흐릿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런던 주변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것, 남자로서, 재단이 잘된 옷을 입고 부러움과 질투 어린 시선을 한껏 받는 멋진 남자로서 걸어 다니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덧없는 자극이자 당시 내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P254
난 알았다. 멋진 감정이었다. 그러나 또한 두려운 감정이기도 했다. 자기가 이런 행운을 누릴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계속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누려야 할 기쁨인데 완전히 실수로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 행운이 코앞에서 사라지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단 그 감정을 맛보고 나면 가슴속 욕망을 계속 충족시키기 위해 하지 못할 일도, 희생하지 못할 대상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키티와 내가 완전히 같은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대상은 달랐다.훗날, 나는 이를 기억했어야 했다. - P99
썩어도 준치 얘기하다가(그 준치가 생선 맞아?) 오랜만에 꺼내본 그림책~~ 오 왜 이렇게 호러블한 느낌이지??
거기에 가톨릭 부르주아 계층이라 교황이 피임에 대해 제시한 훈계들을 존중했기에,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가장 마지막에 선택할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부터 끝까지 내가 속내를 털어놓았던 사람은 바로 그녀다. 나는 이제야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라고 몰아붙이는 욕구는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의 가치관이나 판단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상황에서 말조차 하나의 행동이었고,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며,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현실의 놀라운 광경 속으로 끌고 가보려고 애썼다. -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