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했다. 세상 흔한 것들이 나를 돌보고 있다. 항상곁에 있어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 이를테면 나무와풀과바람, 흙과 물과 공기, 바위 같은 것. 흔한 것이 흔한 이유는 오히려 꼭 필요해서 흔해지지 않으면 큰일이니까 흔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우리가 무시하는 흔한 것들 덕에 무사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 P49

왜 여유에는 ‘찾는다‘는 말을 붙일까? 술래가 "여기 있네!"하고 찾아내면 머쓱하게 튀어나오는 숨바꼭질처럼, 여유는 여기저기 들추어 찾아내는 능동적 감정이라서 그런 걸까? 시간이 아무리 많거나 넓은 공간에 혼자 있어도 여유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백조의 여유로운 모습을 물아래 수많은 발길질이 만들어내듯, 여유는 거만하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찾는‘ 것이다. - P53

수월하지 않은 상황은 언제든 나타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대처하기 위한 힘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불씨는 항상 내부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 불씨가 불꽃이 되도록 모으는 것이다. 힘은 항상 내면에서 출발하며 모여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얼음과 펭귄에게서 배운다. - P67

손톱,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 같은 털. 매번 적절히 깎아줘야 하는 것들이라서 그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거울을 보거나 키보드를 누르다가 또는 양말을 신다가 문득 벌써 깎아야 할 시간이 되었네, 한다. 남성 듀오 ‘어떤 날‘의 노래 <출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루하루 엇비슷하게 살아가다가 은근히 자라난 손톱을 보니 뭔가 달라져 가고 있음을느끼게 된다고. 자라는 손톱을 보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아닌 듯싶다. - P74

소통 관련 강연 전문가 김창옥 씨의 강연 영상을 보았다. 무뚝뚝한 아버지와의 소통을 이야기했는데, 그동안 하지 않던 배웅을 하겠다고 공항에 나온 아버지에 대한 어색함, 그리고 그때 새롭게 보인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해 말하며 그는 덧붙였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이 시작된거라고.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이면 엄마가 된 것이고, 학생들의 뒷모습이 보이면 선생님이 된 것이고,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면 부부가 된 것이라고 했다. - P83

국어시험에 곧잘 나오는 문제가 있었다. ‘~로서‘와 ‘~로써‘의 구별 문제. ‘~로서‘는 자격을, ‘~로써‘는 수단을 나타내는말이라서 ‘판사로서 재판하고 판결로써 결론을 낸다‘와 같이써야 맞다. 그런데 ‘부모로서‘라는 말이라면 느낌이 좀 다르다. 자격이라기보다는 의무에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 P138

아침에 일어나서 시작하는 하루는 어제의 내가 패스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비몽사몽 패스받은 시간을 몰고 나가 이리저리 뛰다 보면, 어느덧 내일의 나에게 시간을 패스해야 할 밤이 찾아온다. 시간을 잘 패스해 보내는 것이밤에 할 일이라면, 엉뚱한 곳에 질러놓았을 때 내일의 내가 고생하겠다. 그렇게 자주 후회하고 가끔 기대하며 밤과 아침 사이 패스가 연속되는 삶을 살아간다. - P141

내 생활이 밝을 때는 다른 이의 어둠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밝음에 익은 눈에는 어둠은 그냥 컴컴하게만 보인다. 어둠 - P162

속에 있는 많은 사물은 같이 어둠 속에 몸을 담가야 비로소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길에 천천히 적응하며 한참 걷고 나면 알게 된다. 어둠은 솔직함과 통한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는 시각 외에 다른 모든 감각이 더 예민해지며,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더 열린다는 것을. - P163

살면서 맺는 관계도 가만히 보면 숨은 그림이나 다른 그림을 찾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눈에 잘 띄지않지만 계속 들여다보면 문득 드러나는 숨은 그림처럼, 어떤이와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그림이 있다. 이런 성격이 있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던. 잘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었을, 당신에게 숨은 여러 모습의 그림들. 나는 그것들을 얼마나 찾아냈을까, 또 아직 남은 그림들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나는 내 안에 감춰진 숨은그림조차 못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옛날에 생각했던 그림과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는 일 역시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 P176

대학 때 받은 교양 미술 수업 생각이 났다. 담당 강사가 두장의 슬라이드 그림을 보여주었다. 먼저 르누아르의 <무도회>그림. "매일 같이 열리는 이런 무도회. 옷이 참 화려하죠? 혹시 이런 옷들은 매일 누가 세탁하는지 생각해 봤나요?" 그다음 슬라이드, 도미에의 <세탁부>가 나타났다. 강가에서 빨래를 마친 후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고단한 모습이 무채색으로 투박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도회의 화려한옷은 아마 저 커다란 빨래 꾸러미 안에 있겠다. 동시대의 두화가는 색채만큼이나 서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 P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 도쿄
임진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준 도쿄 생활자인 작가와 함께 골목길을 따라 킷사텐과 노포식당을, 서점과 문구점을, 미술관과 공원을 산책하는 소소하고 다정한 여행이 귀여운 그림과 함께 한다. 그런 발길 닿는 여행이, 원하는 곳에 맘껏 머무는 여행이 좋다.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아 살짝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 여행의 좋은 점이라면 어디에 머물거나 어디론가 향하더라도 그 지역 그 동네 그 골목만의 킷사텐을 만날 수있다는 점 아닐까. 넓은 도쿄에서 다종다양한 동네와 사람을 멀찍이 바라보며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거리의 킷사텐에 앉아 있는 것. 부담 없이 슬며시 녹아드는 느낌을 고작 몇백 엔만으로 지닐 수 있다. 동네에 존재하는 대화들을 듣고있으면 그 동네의 표정이 그려진다.
게다가 커피뿐 아니라 각종 토스트며 나폴리탄 등 음식도 갖춰져 있으니, 배가 고파지면 곧장 식사 모드로 나를 고쳐 앉게 만들면 그만이다. 어느 킷사텐에서는 ‘졸음 금지‘ 메모를 보고 어떤 여유가 느껴져 오히려 꾸벅꾸벅 졸고 싶어진 적도 있다.
킷사텐이 갖추고 있는 매력이란 입장 전의 외관과 간판, 점내 분위기와 메뉴, 한 장소에 긴 시간을 담고 있는 점주, 그리고 어떤 그리움이 아닐까. 이방인이기 때문에 킷사텐이 이끌어온 그리움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킷사텐으로 향하게 만드는 매력은 분명히 느끼고 있다. - P74

한 시절의 감성을 충분히 담아낸 음악가는 훗날에도 끊임없이들려지며 존재한다. 지난 시절을 한 곡의 노래로 기억하기도 하니까. 서니 데이 서비스가 96년도에 발표한 노래 「동경(東京)」을듣고 있자면 내가 모르던 90년대의 도쿄를, 그것도 벚꽃이 피는시기의 도쿄를 마치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슬로우 라이더」를 들을 때면 서니 데이 서비스 노래 중에는 역시 이 곡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든다. 초등학교 정문을통해 등·하교 하며 가끔 딴 길로 새고 싶을 때면 후문으로 나가는 게 전부였던 삶을 살 때에 이런 노래도 존재했구나 싶은 음악의 힘은 강하다. 노래가 존재했을 당시의 나를 돌이켜보게 된다.
시티 컨트리 시티에 처음 방문한 때는 200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회사에서 입사 두 달 만에 떠난 도쿄 출장이었다. 당시의 대표와 나는 비슷한 음악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취향의 시작이 나보다는 훨씬 이르게 시작된 사람이었기에 부러 출장중에 시티 컨트리 시티를 찾아간 것이었고, 나는 그저 그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 P159

"그렇네요. 내 삶은 요즘 파도 같다고나 할까."
마키짱은 파스타를 먹던 손으로 파도의 물결을 그렸다. 웃으면서 말이다.
거절하면 일이 줄어들까 봐 무리해서 수락한 탓에 바쁠 때에는힘들도록 바쁘고, 일이 없을 때는 바다 밑바닥까지 주저앉는 생계의 파도. 그 말에 슬프게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나도 나도. 파도입니다."
오랜만의 시티 컨트리 시티였기에 맥주를 마시고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마키짱이 먼저 맥주 이야기를 꺼냈다.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싶지만 며칠 전에 치과 치료를 해서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너무 마시고 싶어."
"그럼, 우리 다음에 만나면 술 마셔요."
인사치레를 싫어하는 자의 용기 낸 한마디. 이 말을 인사치레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언어의 다름은 상관이 없구나. 그 어디라 해도, 나의말과 상대의 말이 같은 박자를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 P163

신주쿠의 베르크.
커피를 파는 카페이기도, 끼니가 해결되는 메뉴가 있는 식당이기도, 술과 함께 안주가 될 만한 메뉴도 갖춰져 있으니 술집이기도 한 가게. 너무 소중하다. 가보기 전부터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환상만으로 완벽한 곳.
와세다대학에서 신주쿠까지 걷자고 한 건 홍구 씨였다. 역시나좋은 선택의 일인자다. 어두운 길거리에서 타이야키(붕어빵)를으며, 크레페가 나오면 크레페를 사서 입에 넣으면서 걸었다. 난생처음 걷는 도쿄의 길을, 도쿄의 저녁을 걸으며 캐치볼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신주쿠로 향하는 길은 신주쿠 같지 않았다. 신주쿠 같은 건 대체 무얼까.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신주쿠역의 모습은 신주쿠답지않을지도 모른다. 지하철로 도착하지 않으니 또 다른 곳이다. 그동안 역 안에서 늘 헤매던 내 탓이 컸다. 거리에 사람은 많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정도였다. - P172

미술관은 이와사키 치히로가 생의 마지막 22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던 집 겸 아틀리에의 터에 세워졌다. 『창가의 토토 표지 그림은 ‘아! 이 그림!‘ 할 만한 유명 작품이지만 치히로 미술관은 이전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이와사키 치히로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 찾아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 미술관에서 불어오는 그의 기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 P231

"왜 하필 비가 오는 거야"가 아닌 "비가 와서 더 좋다"라는 말.
서로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흘러나왔다. 비가 와서인지 동네는 유난히 더 고요했다. 사람 없는 미술관에 단둘이 앉아있으니 왠지 우리가 작은 벌레가 되어 큰 나뭇잎 아래에서 쉬는느낌이랄까. - P239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아주 쉽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영화로,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연출했다. 좋아서 몇 번이나보았다. 가장 처음 본 건 개봉했을 당시 대학생 시절, 아마도 혜화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그 이후에도 작은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면 반드시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는 없어진 아트 선재 시네마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 P245

그런 만화 생활 중 ‘대단하다‘라는 감상 끝에 ‘나도‘ 하며 작은욕구가 마음 언저리에 걸터앉은 적이 있다. 국내에는 지금까지네 권의 만화책(놀랍게도 2019년 3월에 두 권이 출간되었다)과 단 한권의 어린이책만이 번역된 타카노 후미코의 만화를 봤을 때 이세상에서 그린 그림이 아닌 듯한 그림체와 이 세상을 겪고 나서삼켜버린 듯한 세계관을 지구라는 배경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방식에 마음을 뺏겼다. 분명히 지구에 살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지구를 벗어나 옛 별을 그리워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감상의끝에서 알 수 없는 응원이 돋아나 ‘어쩌면 나도 하며 슬며시 만화를 그리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2016년 타카노 후미코의 『막대가 하나』가 번역 출간되었을 때, 어느 심야에 만화책을 넘기던 나는 점점 몸을 웅크렸다. 그 안에그려진 어린아이, 만화 속 작은 말풍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싶었다. 한 컷 한 컷이 나의 각기 다른 모든 인생을 대변할 것만 같은, 타카노 후미코만의 우주 같은 맥락들이 내 삶에 퍼즐처럼 다가왔다. - P267

그리고 돌아서는데 신기한 일이 있었다.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담화실에,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인 에머슨 키타무라 씨가있는 게 아닌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취향이 맞다니 달려가서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나를 꽉 잡았다. ‘개인의 시 - P274

간을 지켜주자‘라는 내 캠페인을 실천했다. 멀리서 손을 모으고살짝 인사를 건네며 그렇게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한 달 뒤 홍대 공중캠프에서 그의 공연이 있었고, 당연히 그를보러 갔다. 공연 후 바리바리 가져간 CD에 사인을 받으며 그제야말을 건넸다. 타카노 후미코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당신을 보았고,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기에 혼자서만 기뻤다고. 한 달만의 늦은 주절거림에 신이 났다.
돌아온 건 서니 보이 북스의 타카하시 씨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타카노 후미코 씨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간겁니까?" - P275

또 하나의 다정한 기억이 있다.
전시 소식을 나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한 킷사 퍼블리크 팔러 SAMPO의 점주분께서 부러 전시를 보기 위해 서니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이런 후기를 남겨주었다.
이전에 카페에 내점했을 때, 기회가 있다면 꼭 작품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씨의 개인전에.
진아 씨의 언어와 일러스트는, 마치 통풍이 잘되는 곳에 몸을 두고 있는 것같아서 참으로 상쾌해집니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다가 그림이 액자 안에 담 - P369

기고, 그 액자가 창문이 되어서 어떤 기운을 전하고 전해 받는다는 것.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처럼 혹은 장난 같은 마법처럼, 도쿄의 작은 마을에 작은 비밀의 문이 창문처럼 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발을 담그고 싶은 비밀의 문.
전시를 보는 사람과 책을 넘기는 사람이 잠시나마 작은 숨을들이쉬고 내쉬는 시간을 선명히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누군가는 그런 시간을 가진 것이니, 정말 기뻤다. 통풍이 잘되는곳에 몸을 두고 있다는 표현을 어찌 할 수 있었을까. 과연 명언의나라, 후기의 나라라는 생각을 지나며 강한 감동을 받았다. 분명, 일상에서 때때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 정말좋은 일상이 아닐 수 없다. - P370

나는 더 이상 나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남겨질 만한 자국들을 신경 쓰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걸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예술 혹은 일러스트? 스스로던진 질문에 울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자국을 남기는 사람이야. 나로부터 생기게 되는 모든 자국들. 지금이기에 가능한, 나를 써서 없어지지 않게 된 자국을 기분 좋게 표현하고 싶은 것뿐이야." - P371

그리고 끝까지 다정한 언어를 선물받았다. 전시가 끝난 후에도타카하시 씨가 마음을 써주어 기간 한정으로 서니 홈페이지 온라인 스토어에서 그림 몇 점을 판매했다. 멀리서 전시를 보러 오지못한 이들을 위함이었다. 게시한 이튿날 타카하시 씨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자기 전에(그림 제목)」가 조금 전 온라인으로 여정을 떠났습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 문장을 읽으며 건강에 좋은 웃음과 동시에 눈가에 물이 가득 찼다. 답장을 하기 전에 한강을 잠시 바라보았다. 성산대교 밑 한강에 비친 각종 빛들이 울렁였다. 이 명언의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사사로운 태도를 끝없이 배우며 서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 세상의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을 따라, 서니에서부터 출발해 누군가의 장소에 다다르는 내 그림을 상상해본다. 가방을메고 신칸센을 타는 상상까지.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 P3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의 언어
김겨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첫 구독과 좋아요와 알람 설정을 위해 귀차니즘을 뚫고 지메일을 만들도록 한, 유튜브의 세계를 열어준 김겨울. 그의 재미없음이 좋다. 그의 진지함이 좋다(그래서 이 책의 앞 부분이 더 좋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책 이야기가 좋다. 그의 시집을 기다리고 철학책을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임레 케르테스 『운명」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 - P74

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말것. 부정하지말것.속삭이지 말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 P75

네이딘 버크 해리스의 책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는 아동기에 겪은 불행과 성인기 건강 사이의관계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행은 단순히 ‘나쁜 일‘이 아니라 아동에게 벌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들을 말한다. ‘ACE‘, 그러니까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는 직역하면 ‘아동의 역경 경험‘ 정도 된다. 아동기에 겪은 ‘유독성 스트레스‘, 즉 회복 가능한 수준의스트레스가 아닌 신체적 반응을 반복적으로 마비시키는강력한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 P89

서른 살에 쓴 「고백」이라는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는 삶을 끌어안고 분투하느라 보낸 이십 대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십 대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덕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요. 침대맡에도 주머니 속에도 달라붙어 있겠지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

* 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 - P92

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계속 무마해보겠습니다." 무마의 약속은 곧 도전의약속이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 P93

북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인 유지원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김상욱 교수와 함께 쓴 책인 뉴턴의 아틀리에」를 직접 디자인하면서 어떤 점들을 고민했는지 이야기했다. 물리학자와 함께 내는 책이므로 물성이 고려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거짓말을 하는 물건이 되니까요." 정신과 몸이,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 - P186

정말로 나도, 기적처럼 이 모든 것을 바꿔줄 기술이 마법처럼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도 스마트폰을, 커피를, 딸기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국가 간의 안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껏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고(밝히건대 나는 자연파와 도시파 중 철저한 도시파 여행자다), 이런 험악한 글 대신 우아한 글을 쓰고 싶다. 소비로 인한 자기비난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늘 기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오늘 쓴 텀블러를 세척하 - P242

고 재활용품을 분류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쉴지언정 그런 의식이 큰 문제에 있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는 작은 계기임을 상기한다. 계속해서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기는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 P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