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의 좋은 점이라면 어디에 머물거나 어디론가 향하더라도 그 지역 그 동네 그 골목만의 킷사텐을 만날 수있다는 점 아닐까. 넓은 도쿄에서 다종다양한 동네와 사람을 멀찍이 바라보며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거리의 킷사텐에 앉아 있는 것. 부담 없이 슬며시 녹아드는 느낌을 고작 몇백 엔만으로 지닐 수 있다. 동네에 존재하는 대화들을 듣고있으면 그 동네의 표정이 그려진다.
게다가 커피뿐 아니라 각종 토스트며 나폴리탄 등 음식도 갖춰져 있으니, 배가 고파지면 곧장 식사 모드로 나를 고쳐 앉게 만들면 그만이다. 어느 킷사텐에서는 ‘졸음 금지‘ 메모를 보고 어떤 여유가 느껴져 오히려 꾸벅꾸벅 졸고 싶어진 적도 있다.
킷사텐이 갖추고 있는 매력이란 입장 전의 외관과 간판, 점내 분위기와 메뉴, 한 장소에 긴 시간을 담고 있는 점주, 그리고 어떤 그리움이 아닐까. 이방인이기 때문에 킷사텐이 이끌어온 그리움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킷사텐으로 향하게 만드는 매력은 분명히 느끼고 있다. - P74

한 시절의 감성을 충분히 담아낸 음악가는 훗날에도 끊임없이들려지며 존재한다. 지난 시절을 한 곡의 노래로 기억하기도 하니까. 서니 데이 서비스가 96년도에 발표한 노래 「동경(東京)」을듣고 있자면 내가 모르던 90년대의 도쿄를, 그것도 벚꽃이 피는시기의 도쿄를 마치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슬로우 라이더」를 들을 때면 서니 데이 서비스 노래 중에는 역시 이 곡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든다. 초등학교 정문을통해 등·하교 하며 가끔 딴 길로 새고 싶을 때면 후문으로 나가는 게 전부였던 삶을 살 때에 이런 노래도 존재했구나 싶은 음악의 힘은 강하다. 노래가 존재했을 당시의 나를 돌이켜보게 된다.
시티 컨트리 시티에 처음 방문한 때는 200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회사에서 입사 두 달 만에 떠난 도쿄 출장이었다. 당시의 대표와 나는 비슷한 음악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취향의 시작이 나보다는 훨씬 이르게 시작된 사람이었기에 부러 출장중에 시티 컨트리 시티를 찾아간 것이었고, 나는 그저 그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 P159

"그렇네요. 내 삶은 요즘 파도 같다고나 할까."
마키짱은 파스타를 먹던 손으로 파도의 물결을 그렸다. 웃으면서 말이다.
거절하면 일이 줄어들까 봐 무리해서 수락한 탓에 바쁠 때에는힘들도록 바쁘고, 일이 없을 때는 바다 밑바닥까지 주저앉는 생계의 파도. 그 말에 슬프게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나도 나도. 파도입니다."
오랜만의 시티 컨트리 시티였기에 맥주를 마시고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마키짱이 먼저 맥주 이야기를 꺼냈다.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싶지만 며칠 전에 치과 치료를 해서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너무 마시고 싶어."
"그럼, 우리 다음에 만나면 술 마셔요."
인사치레를 싫어하는 자의 용기 낸 한마디. 이 말을 인사치레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언어의 다름은 상관이 없구나. 그 어디라 해도, 나의말과 상대의 말이 같은 박자를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 P163

신주쿠의 베르크.
커피를 파는 카페이기도, 끼니가 해결되는 메뉴가 있는 식당이기도, 술과 함께 안주가 될 만한 메뉴도 갖춰져 있으니 술집이기도 한 가게. 너무 소중하다. 가보기 전부터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환상만으로 완벽한 곳.
와세다대학에서 신주쿠까지 걷자고 한 건 홍구 씨였다. 역시나좋은 선택의 일인자다. 어두운 길거리에서 타이야키(붕어빵)를으며, 크레페가 나오면 크레페를 사서 입에 넣으면서 걸었다. 난생처음 걷는 도쿄의 길을, 도쿄의 저녁을 걸으며 캐치볼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신주쿠로 향하는 길은 신주쿠 같지 않았다. 신주쿠 같은 건 대체 무얼까.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신주쿠역의 모습은 신주쿠답지않을지도 모른다. 지하철로 도착하지 않으니 또 다른 곳이다. 그동안 역 안에서 늘 헤매던 내 탓이 컸다. 거리에 사람은 많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정도였다. - P172

미술관은 이와사키 치히로가 생의 마지막 22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던 집 겸 아틀리에의 터에 세워졌다. 『창가의 토토 표지 그림은 ‘아! 이 그림!‘ 할 만한 유명 작품이지만 치히로 미술관은 이전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이와사키 치히로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 찾아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 미술관에서 불어오는 그의 기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 P231

"왜 하필 비가 오는 거야"가 아닌 "비가 와서 더 좋다"라는 말.
서로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흘러나왔다. 비가 와서인지 동네는 유난히 더 고요했다. 사람 없는 미술관에 단둘이 앉아있으니 왠지 우리가 작은 벌레가 되어 큰 나뭇잎 아래에서 쉬는느낌이랄까. - P239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아주 쉽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영화로,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연출했다. 좋아서 몇 번이나보았다. 가장 처음 본 건 개봉했을 당시 대학생 시절, 아마도 혜화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그 이후에도 작은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면 반드시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는 없어진 아트 선재 시네마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 P245

그런 만화 생활 중 ‘대단하다‘라는 감상 끝에 ‘나도‘ 하며 작은욕구가 마음 언저리에 걸터앉은 적이 있다. 국내에는 지금까지네 권의 만화책(놀랍게도 2019년 3월에 두 권이 출간되었다)과 단 한권의 어린이책만이 번역된 타카노 후미코의 만화를 봤을 때 이세상에서 그린 그림이 아닌 듯한 그림체와 이 세상을 겪고 나서삼켜버린 듯한 세계관을 지구라는 배경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방식에 마음을 뺏겼다. 분명히 지구에 살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지구를 벗어나 옛 별을 그리워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감상의끝에서 알 수 없는 응원이 돋아나 ‘어쩌면 나도 하며 슬며시 만화를 그리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2016년 타카노 후미코의 『막대가 하나』가 번역 출간되었을 때, 어느 심야에 만화책을 넘기던 나는 점점 몸을 웅크렸다. 그 안에그려진 어린아이, 만화 속 작은 말풍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싶었다. 한 컷 한 컷이 나의 각기 다른 모든 인생을 대변할 것만 같은, 타카노 후미코만의 우주 같은 맥락들이 내 삶에 퍼즐처럼 다가왔다. - P267

그리고 돌아서는데 신기한 일이 있었다.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담화실에,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인 에머슨 키타무라 씨가있는 게 아닌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취향이 맞다니 달려가서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나를 꽉 잡았다. ‘개인의 시 - P274

간을 지켜주자‘라는 내 캠페인을 실천했다. 멀리서 손을 모으고살짝 인사를 건네며 그렇게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한 달 뒤 홍대 공중캠프에서 그의 공연이 있었고, 당연히 그를보러 갔다. 공연 후 바리바리 가져간 CD에 사인을 받으며 그제야말을 건넸다. 타카노 후미코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당신을 보았고,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기에 혼자서만 기뻤다고. 한 달만의 늦은 주절거림에 신이 났다.
돌아온 건 서니 보이 북스의 타카하시 씨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타카노 후미코 씨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간겁니까?" - P275

또 하나의 다정한 기억이 있다.
전시 소식을 나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한 킷사 퍼블리크 팔러 SAMPO의 점주분께서 부러 전시를 보기 위해 서니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이런 후기를 남겨주었다.
이전에 카페에 내점했을 때, 기회가 있다면 꼭 작품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씨의 개인전에.
진아 씨의 언어와 일러스트는, 마치 통풍이 잘되는 곳에 몸을 두고 있는 것같아서 참으로 상쾌해집니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다가 그림이 액자 안에 담 - P369

기고, 그 액자가 창문이 되어서 어떤 기운을 전하고 전해 받는다는 것.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처럼 혹은 장난 같은 마법처럼, 도쿄의 작은 마을에 작은 비밀의 문이 창문처럼 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발을 담그고 싶은 비밀의 문.
전시를 보는 사람과 책을 넘기는 사람이 잠시나마 작은 숨을들이쉬고 내쉬는 시간을 선명히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누군가는 그런 시간을 가진 것이니, 정말 기뻤다. 통풍이 잘되는곳에 몸을 두고 있다는 표현을 어찌 할 수 있었을까. 과연 명언의나라, 후기의 나라라는 생각을 지나며 강한 감동을 받았다. 분명, 일상에서 때때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 정말좋은 일상이 아닐 수 없다. - P370

나는 더 이상 나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남겨질 만한 자국들을 신경 쓰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걸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예술 혹은 일러스트? 스스로던진 질문에 울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자국을 남기는 사람이야. 나로부터 생기게 되는 모든 자국들. 지금이기에 가능한, 나를 써서 없어지지 않게 된 자국을 기분 좋게 표현하고 싶은 것뿐이야." - P371

그리고 끝까지 다정한 언어를 선물받았다. 전시가 끝난 후에도타카하시 씨가 마음을 써주어 기간 한정으로 서니 홈페이지 온라인 스토어에서 그림 몇 점을 판매했다. 멀리서 전시를 보러 오지못한 이들을 위함이었다. 게시한 이튿날 타카하시 씨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자기 전에(그림 제목)」가 조금 전 온라인으로 여정을 떠났습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 문장을 읽으며 건강에 좋은 웃음과 동시에 눈가에 물이 가득 찼다. 답장을 하기 전에 한강을 잠시 바라보았다. 성산대교 밑 한강에 비친 각종 빛들이 울렁였다. 이 명언의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사사로운 태도를 끝없이 배우며 서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 세상의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을 따라, 서니에서부터 출발해 누군가의 장소에 다다르는 내 그림을 상상해본다. 가방을메고 신칸센을 타는 상상까지.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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