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작가 응우옌 응옥 뚜의 『끝없는 벌판]을 읽다가 그 강렬한 기억을 소환해버렸다. 애써 잊고 살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캄캄한 눈앞에 그날의 광경이 선명히 그려졌다. 나는 책을 읽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처참한 농촌의 현실이 내 이야기 같아 울렁이는 가슴을 연신 쓸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베트남의 헐벗고 굶주린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가정의붕괴를 이야기한다. 가난 때문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런 아내의 배신으로 여자에게 모욕 주는 것을 일삼는 아버지, 무관심과 폭력에길들여진 남매. 병든 가족은 거룻배를 타고 가뭄으로 말라붙어가는 강을 떠돌며 오리를 치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삶은 불행한 이들에게 유독 지독한 구석이 있다. 결국 벼랑으로 내몰고서야 성에 차듯 말이다. - P29

윤간당한 몸으로 만일 생명을 잉태했다면 아이를 어찌 키우며어미로 살아갈지 이야기하는 여인을, 눈을 감고 떠올렸다. 날카로운 햇볕이 정수리를 쪼갤 듯 쏟아져 내렸다. 서걱서걱 옥수수 잎이바람에 흔들리며 웅성댔다. 땀줄기가 목덜미 고랑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람에 부비적대는 옥수수 잎 소리가 오리 떼의 날갯짓 소리처럼 들려왔다. 『끝없는 벌판을 읽고 인간은 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줄곧 고민했다. 사실 그건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그나마 희망 따위라도 있어야 질긴 생을 견뎌낼 수 있음을 알았다. 뜨거운 바람이 흙냄새를 싣고 잔잔히 몰려왔다. 두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농사꾼의 딸이었던 나는 바람에서 튼실한 생육의 냄새를 맡았다. 그건 내 옆을 지키고 서 있던 베트남인 가이드에게서도맡아지는 젊음의 내음이었으며 베트남의 향기였다. - P35

나는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이 선글라스를 뚫고 내 눈으로 파고들었다. 빛은 내 안으로 깊이 투과해 들어왔다.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장애를 이해하려는 사람들 덕분에나는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백두산 여행도 나에게는 그 한 걸음이었다.
나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먼저 하산한 일행이 수고했다며 맞이해줬다. 나는 내가 올랐던 1,442개의 계단을 다시 돌아봤다. 계단 하나하나에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천지로 향했을 거였다. 가마를 탄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왔다. 어떤 이들이 어머니가 어찌 저리 밝고 명랑할 수 있냐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암울한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은 온 힘을 다해 명랑함을 짜내며버텨내는 것이리라.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했다. 그건내 삶의 방식이었다. - P60

풀벌레 떼 사이로 은퇴한 줄 알았던 옛 스타가 마지막 힘을 끌어내 앙코르 곡을 불렀다. 그 노래는 여름의 찬가로 시작해 아버지의술주정처럼 느닷없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 매미 소리를 들으며 부식된 감정의 조각을 여름이 지나가는 창밖을 향해 힘껏 던졌다. - P171

"아이를 낳으면 우리 언니가 다 키워주고 돈 걱정 없이 먹고살준비까지 다 해준다고 했어. 그러니 자기가 후배 중에 괜찮은 숙맥총각 하나 이어줘 봐. 우리 조카가 오손도손 사는 게 내 소원이야."
본 적도 없는 원장님의 조카가 불쌍했다. 당사자의 의사는 묵살된 채,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강제당하는 삶이 측은했다. 슬슬 심술보가 발동했다. 원장님의 환상을 와장창 깨부술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눈먼 사기꾼, 바람둥이, 알코올 중독자...... 어떤 동료를 소환해야 원장님한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때 원장님이 무언가 불현듯 떠올랐는지 내게 말했다.
"근데 자기. 자기는 장애인인데 왜 이렇게 못됐어?"
예상치 못한 강펀치였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울 속 그녀를흘기며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성격의 장애인만 있으니 중매 따위는 바라지도 말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원장님은 큰 깨달음을 얻은 - P217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맞네. 장애인이라고 순수할 거라는 건 내 착각이네."
그녀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내 존재로 장애 인식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만족감이 들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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