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힘의 관성‘에 대해 생각했다. 한번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말하기를 시도한 사람들은 계속 말하게 된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연히 안다. 부당한 일을 목격해 왔고, 차별과 혐오를 발견하는 시선이 생겼으며, 아주 조금씩이지만 세상이 바뀌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일이 그저 관성이라고 생각하니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같았다. 가볍게 더 멀리 미끄러질 수 있도록, 다른 건 제쳐 두고 다음엔 지민과 동숲 통신을 하기로 약속했다. - P29

변재원 작가의 책 <장애시민 불복종》에서 작가와 함께 술을 마시던 장애인 활동가는 "데모를 통해 중증장애인이 세상을 만나게 된다."라고 데모의 의의를 설명한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애를 지닌 몸 그 자체가 장애인 권리 보장의 유일한 근거가 되며, 그로 인해 "장애인은 자신의 몸을 더 아끼는 동시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라는 책의 설명이 떠올랐다.
휠체어를 타면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넌 평생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성희가, 세상의 온갖 부조리한 일을 목격하던 성희가 그 진창 속에서 자기 몸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찾아냈다는 것이 좋았다. - P76

지우 갔다 오시니까 어땠어요?
서윤 이제 무기울게 없다. 이거 뭐 이제 무서울 거 없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하고. 하기 싫은 거 있으면 안 하고, 못하는 거 있으면 두드려 보고, 안 되면 말고. 딱 진짜 정신 무장이 된 것 같더라고요.

인터뷰어는 듣는 이로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난 거리 두기에 늘 실패하고 만다. "또 갈 수 있겠는데?"라던 성희 언니의 말을 들었을때처럼, "이제 무서울 게 없다."라는 서윤 언니의 말에 거리를가늠하던 마음이 성큼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장애가 있는 여자들이 "직접 해 보니 할 수 있었다."라고말하는 게 왜 이리 좋을까. 자신의 성공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에게 가능성을 전달하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은아닐까. 언니들이 간 곳은 가 보지 않아도 가 본 곳 같고, 해낸일은 해내지 않아도 내 성취 같다. 먼저 해낸 언니들이 전하는 "할 수 있었다."라는 말은 나를 투과해 저 멀리 퍼져서, 비슷한 몸을 가진 이들을 연결하는 망이 된다. 그래서 난 하염없이 이 말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 P106

한 어머니는 내게 와서 "A가 혼자 외출한다는 건 상상이 안 돼요......."라며 걱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나 역시 스무 살에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탔다. 별거 아닌 그 행동에도 터질 듯한심장을 진정시키면서, 홀로 무언가 해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제야 깨달았다. 한 바퀴 더 굴러갈수록 세상이 넓어졌다. 나는 엄마 없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에서 동네를 누비고, 가족과 다른 공간에서 살고,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는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명확히 안다. 얼마만큼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알아야 내 세계가 커진다는 걸. 그러려면 길거리에서 넘어져도보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동네를 돌아다녀도 봐야 한다.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일탈도 해 봐야 한다. 아이를 걱정하는부모님의 고민을 들으면 나의 독립을 도왔던 문장 하나를 전해 드린다.
"애들 내보내세요. 안 죽어요. 다쳐도 병원 가면 돼요. 혼자 내보내세요."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김형수 총장의 말이다(그 역시 뇌성마비다). - P155

이 말이 우리 몸에서 살아 숨 쉬는유산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문장은 성희 언니에게서 "또 갈 수있겠는데?"라는 말로, 서윤 언니에게서 "이제 무서울 게 없다." 라는 말로 조금씩 바뀌어 흐른다. 그렇게 세상으로 한 바퀴 나간 언니들은, 그 순간을 혼자만의 성취로 간직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이들을 불러 모은다. 이 기분을 나만 느낄 수 없다고,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고 말하며 운동을 하고, 모임을 만들고, 민원을 넣고, 사업을 한다.
나도 그 움직임에 동참하고 싶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쓰는이유다. 우리와 공명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글을 읽고있다면, 두려워서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얼른 이 보물같은 문장 "나, 갈 수 있구나."를 자신의 언어로 직접 만나라고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꾹꾹 힘을 눌러 담아 글을 쓴다. - P207

언니의 말에 괜히 기운이 났다. 온몸으로 내게 "계속하면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인권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이 호소하는 감정 중 하나는 ‘소진감‘이다.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현실에서끌어내기는 어렵고,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기에 자꾸만 실망하게 된다. 나 역시 종종 지쳤고 실망했다. 사실 지금도 그 상태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말하는 게 두려워졌고, 이전 같으면 분노하고 행동할 일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나를발견한다. 그렇게 무던해진 나를 보고 또 실망하곤 했다.
효선 언니는 흐릿해진 나를 보며 계속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계속하라고. 조금씩 쌓다 보면 분명 변하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실망하지 말라고. 나를 실망하게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먼저 길을 떠난 언니가, 수많은 변화를 목도했을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 시야가 조금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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