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몸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을 구분하곤 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까대기는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거다. 몸으로 하는 일은 이삿짐을 나르거나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거다. 까대기는 남은 수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 안에 - P140

품고 있던 생명력을 레몬즙 짜듯이 쥐어짜내서 그 대가로 먹고사는 일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P141

나는 까대기를 하면서 노예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식으로서가아니라 신체에 와 닿는 감각으로서 말이다. 노예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킬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근무 중에 구타나 폭언은 없었다. 관리자들은 적당히 냉정했고 적당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폭탄차를끝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누구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버틸 수 있는 물리적 한계라는 게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매일같이 견고하지 못한 그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을 요구받는다. 일을 마치려면자신을 보호하려는 가장 기초적인 요구를 무시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짐의 무게, 양, 작업 속도 어디에도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까대기는 직설적이다. 보통이라면 결혼하고 첫애 태어날 때쯤 간신히 고백할 만한 비밀을 소개팅 자리에서 질러버린다. 다른 평범한 일들이 에둘러 암시하고 마는 것, 육아휴가니, 산업안전보호법이니 하는 것들로 어설프게 감춘 것을 까대기는 노골적으로 까발린다. 너는 도구다. 회사가 필요한 결과를 만드는 데 필요한 망치나 드라이버 같은 거다. 그것들보다 다루기 어렵고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도구다. 이 일이 우리의 존재에 일깨우는 감각이 그것이다. - P160

"나 처음 일한 날이었는데 새벽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다가 다끝나고 밖에 나왔는데... 어떤 건지 알죠? 진짜 그지꼴로 간신히 서 있을 힘만 남아서... 근데 나가니까 햇빛이 막 쏟아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게, 와아아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 보이냐. 오기 전엔나도 걱정 많이 했어요. 20대 때 노가다 좀 뛰었지만 그거야 30년 전 일이고 젊은 애들도 골골댄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좀 버벅댔지만 끝날 때쯤 되니까 할 수 있겠더라고. 나는 거뜬히 하는데 등치 막 이따만한 노랭이들이 힘들다면서 집에 가는 거 보니까 기분도 좋고 흐흐.
그러면서 밖에 나왔는데... 노오오오란 해가 떠 있는 걸 딱 보고 있는데…. 그걸 뭐라고 할까, 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나 살 수 있겠다.... 충분히 살 수 있겠다.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게 참 희한해. 밤새술퍼마시다가 해 뜨는 걸 볼 때는 세상에 그렇게 비참한 게 없는데.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고 쓰레기 같고 이렇게 또 하루 사느니 그냥 콱 뒤져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데, 일 끝나고 해 뜨는 걸 보면 나도 뭔지 모르겠는데, 보고 있으면 그냥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 P177

휴가도 3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1년 내내 집에만 있자 연금보다 먼저 우울증이 찾아왔다("퇴직하고 집에만 있는 애들은 다 어디가 아파").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없는 것만큼 그를 참담하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은퇴는 꿈꿔왔던 ‘인생 2막‘이아니라 일종의 임사체험이었다.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죽음이 온다." - P272

"아저씨도 쟤네 쭉 보셨죠? 우리랑 똑같이 걷지 않았어요? 달리지도않고 서둘지도 않고. 근데 언제 쟤네들이 저렇게 앞에 간 거예요?"
성재 아저씨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왜 우리가 너 계단 뛰어 올라갈 때 대단하다는지 알겠지? 젊은게... 젊은 게 초능력이야. 우리가 아무리 운동하고 영양제 챙겨 먹어도몸 쓰는 건 젊은 사람 못 따라가 더 힘이 세고 오래 버티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차원이 달라. 너가 보기엔 쟤네들이 그냥 걸음이 빨라 보이지? 내 눈엔 쟤네들이 슈퍼맨으로 보여."
60대 노인들이 40대인 내가 계단 오르는 걸 올려다볼 때의 막막함과인간인 내가 로봇이 유리를 닦고 물건을 나르는 것을 볼 때의 막막함 중어느 쪽이 더 암담할까? 어느 쪽일까?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교복입은 아이들은 점점 더 멀어졌다. 처음엔 왠지 오기가 나서 발걸음을 재촉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그들을 따라잡기란 광견병에 걸린 개가 내 아름다운 대둔근을 노리고 달려오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 같았다. 중년의육체로 10대의 육체를 따라잡기가 이 정도로 벅찬 일이라면, 쉽게 다치고 부서지는 육체로 늙지도 지치지도 않는 육체를 쫓아가는 것은 어떤것일까?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란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기에 빠르게 저무는 하루가 내게는 조금 더 어둡게느껴졌다. - P351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똑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책은 그에게 일회용품이었다. 결말을 알면 끝이었고 두 번다시 꺼내 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책에도 줄거리 이상의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훌륭한 책은 도서관이 안겨주는 신비를 지면 위에서 되풀이해 보였다. 분명 한줄한줄 꼼꼼히 읽었는데도 다시 읽어보면 그전에 발견하지 못한 문장들이 보였다. 마치 그가 책장을 덮은뒤에 활자들이 자리를 바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 밤 그는 활자들 사이에서 기쁜 마음으로 길을 잃었다. 그는 자 - P360

신이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고래의 몸속에 육지 동물의 신체가 남아 있듯이 이미 스스로를 절반쯤은 공무원으로 여기던 한승태의 내부에도 책과 글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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