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단순히 감상적인 시도만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콜센터였다. 콜센터가 내 작가 경력에 남긴 최고의 성취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묘비 문구를 결정짓게 도와준 것이다. 이름 옆에 딱 이렇게만 적을 생각이다.
"콜센터가 제일 힘들었다."
뒤에서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매일매일 헤드셋을 통해 쏟아지는 모욕과 무시를 참아내느니 차라리 온종일 돼지 똥을 치우는 일이 더 편할 것같았다. 100여 년 전, 콜센터 상담사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이있었다. 바로 전화교환수다. - P11

이 일이 유난히 힘들고 긴장되는 이유 하나는 나라는 존재가 불특정다수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데 있다. 누구나 우리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칠 수 있었고 실제로 곧잘 그렇게 했다. 전화 상담사라는 일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나는 고객의 말에 난타당해도 버텨낼 수 있는 심리적 맷집을 기를 수 있느냐에 달렸다.
맷집이란 게 그렇듯이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저 두들겨 맞는 것밖에. 다만 권투 경기와 달리 우리는 상대가 방심한 사이 녹다운을 노리는게 아니었다. 맞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 강철 같다고 믿었던 내 정신 상태는 실제로 부딪혀보니 단단하기가 크로아상 수준이었다. 여기서 오래 일하면 내 월급의 상당 부분이 정신과 의사들이 제주도 별장 구입하는 데 들어가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 P50

그다음부터는 내가 스스로를 감시한다. 화장실에 가야겠다 생각이 들면 한승태 이름 옆에 표시된 ‘이석‘의 숫자가 올라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면 팀장이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리에 다시 앉는다. 괴팍한 고객에게 한참을 시달리고 잠깐 쉬고 와야겠다 하다가도 내가 받은 전화 수가 60이 넘었나 부족한가에 생각이미치면 바로 다음 전화를 받는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 자신을 몰아붙인다. 만신창이가 돼서 튕겨져 나가버리거나 운이 좋게 관리자로 빠져나갈 때까지.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더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다." - P60

매일 밤 그만둘 핑계를 궁리하며 밤을 지새웠다. 처음으로 양돈장에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농장에서 도망칠 궁리만 했었다. 내게는 양돈장과 콜센터를 비교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전자가 항문으로 똥을 싸는 동물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면 후자는 입으로똥 싸는 동물들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두 종류의동물들과 모두 일해본 관점에서 말하건대 양돈장이 단연코 수월하다. - P62

"그냥 이 상품 화면에다 조그맣게 적어두면 안 돼요?"
나도 얘기했고 고객도 얘기했고 관리자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째선지 절대로 그렇게 안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고객센터의존재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상담사는 땜장이다. 융통성 없는 업무 프 - P89

로세스와 엉성한 홈페이지 시스템의 틈새를 상담사의 사과로 덕지덕지발라 메꾼다. 그래서 대대적인 수리 없이 그냥저냥 굴러가게 만든다. 매운 닭발을 포식하면 그다음 날 항문이 대가를 치르듯이 시스템상의 수많은 허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는 최종적으로 콜센터에서 치른다. 그렇다, 나는 전화 상담사를 자본주의 사회의 항문 돌기에 비유한다! 맛을 보고 즐거워하는 건 저 위쪽의 기관이고 더럽고 치사한 꼴을 봐야하는 건 우리였다. 만약 콜센터업계에 정의란 게 이루어진다면 고객센터 대신 소비자들은 회사 경영진과 대주주, 본사 홈페이지 담당자들의연락처가 담긴 비상연락망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 P90

업종을 막론하고 콜센터 상담사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단연코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다.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아마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일 거다. 상담사와 고객이 맺는 관계의 진실이, 결코 자신의 문제일 수 없는 일을 자기 일처럼 대하길 요구받는 사람의 딜레마가, 밥벌이의 수단으로 친절을 사용해야 하는 일자리의 모든 것이 이 한마디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상담사의 프로페셔널함은 고객을 대할 때관심과 정성을 쏟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의 요구와 필요에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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