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이지」 나르치스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母性)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골드문트는 눈을 크게 뜬 채 나르치스가 마치 연설가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들어 이야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르치스의 말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비수처럼 그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말았다. - P74
언젠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니 그의 영세명성자(聖者)인 골드문트에 대하여 꿈꾼 적이 있다. 골드문트라고도 불리우는 크리소스토무스 성자는 황금의 입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황금의 입으로 말을 했고, 그러면 그가 하는 말들은 꿈꾸는 작은 새가 되어 날개를 파닥이며 떼지어날아가곤 하였다. - P99
그런데 골드문트 자신은 어떻게 될까? 이십 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일까? 아, 모든 것이 불가사의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기만 했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이 땅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숲을 가로질러 말을 달리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뭔가를 요구하고 약속하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도하는 여러 가지 것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저녁 하늘의 별, 갈대숲처럼 푸르른 바다, 어떤 사람이나 혹은 소의 눈길, 이런 것들과 마주치는 것이다. 그러면 때로는 여지껏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오래전부터 그려오던 어떤 일이 바야흐로 벌어지는 듯한 확신과 함께 모든 것의 너울이 벗겨져 내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그런 순간도 지나가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고 만다. 여전히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비밀의 마법도 풀리지 않으며, 결국은 늙어서 안젤름 신부님처럼 노회해 보이거나 다니엘 수도원장님처럼 지혜로워 보이더라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 P118
나한테 너무 잘해 주었던 그 여자 역시 내 목표는 아니야. 그녀에게 가긴 하지만, 그녀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야. 가야만 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가는 거야」 골드문트는 입을 다물고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우정이 느껴지자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이윽고 골드문트가 말을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렇지는 않아. 나는 가야만 한다고 느끼기에, 그리고 오늘 너무나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기꺼이 떠나는 거야. 그렇지만 순전히 행복감과 만족감에 젖어 달려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생각에는 힘든 길이 될 거야. 그렇지만멋진 길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한 여자에게 속한다는것,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잖아! 내가하는 말이 어이없게 들리더라도 비웃지는 마. 그런데 보라구.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에게 자신을 바친다는것, 그녀를 온전히 내 속으로 감싸고 또 그녀에게 감싸여있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하면서 다소 비웃는 그런 상태와는 달라. 그건 비웃을 일이 아니야. 나에게는 사랑이 곧 삶으로 통하는 길이고 삶의 의미로 통하는 길이야. 아, 나르치스, 나는 네 곁을 떠나야만해! 나르치스, 너를 사랑해. 그나마 잠잘 시간도 없는데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주어서 고마워. 네 곁을 떠나려니 마음이 무거워. 나를 잊지 않을 거지?」 - P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