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이 흐르는 발표장에서 김재용 교수가마이크를 잡았다. 김 교수는 문제 상황 앞에서 과학자와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장 최신의과학적 근거를 최대한 모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진정한 전문가라면 최선의 조치를 하기 위해 현재까지 확보된 근거를 토대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발언했다. 연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런 판단도 결정도 할 수 없다는 말은 과학을 빙자한 책임회피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모인 좌 - P171
석에서 박수가 울렸다. 여러 현장에서 나는 피해자들이 주최 측이나발언자를 성토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본 지지의 의사 표현은 내게 과학의약속을 새롭게 만들어 나갈 기회의 틈으로 보였다. 피해자들의 즉각적이면서도 분명한 의사표시는 피해자가 지지하는 전문가가 누구인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과학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했다. - P172
과학과 정치에 관한 이해를 새롭게 할 것을 주장한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다."라투르의 이 말은 과학기술학계의 기본 신조로 여겨진다. 과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학문이 아니라 연구와 조사를 바탕 삼아 특정 시점에서 가능한 답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과학에 다양한 속성이있고 여러 이름이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과학이 객관적이지 않다거나 과학의 권위가 상실되었다는 것과 다르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불완전하게나마 가용 자원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재난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 P190
현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만큼 ‘고구마‘ 상태다. 현실에서 시원한 사이다 같은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학과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환경문제는 그 자체로 뿌리식물인 고구마를 연상시킨다. 줄줄이 얽혀 있는 고구마와 고구마와 고구마들.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둘러싼 감지되지 못한 신호, 불확실성의 경계 만들기, 꿈쩍 않는 기득권, 제도적 미비,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지식과실천...... 고구마의 연속이다. 과학과 객관성과 확실성과 전문성에 관한 해묵은 오해들은 수확 전의 고구마를 뒤덮은 흙처럼 자연스럽게 묻어 있다. 이제는 그 흙을 털어 낼 시간이다. 나는 고구마 줄기처럼 뒤엉킨 느린 재난의 과정을 들여다보며 재난에 맞서는 과학을 발견했다. 재난을 통과하며 얻은 교훈은 깊숙이 한데 뭉쳐 보이지 않는 위험을 이해할 자산이 된다. 이를 위해서라도 과학과정치가 별개의 차원에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과학이 지닌 힘을 활용할 수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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