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윽고 자흔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밤, 열시 삼십오분 차예요. - P42
어둠의 사육제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중년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지하철에서 발을 밟혔다. 나는 머쓱한 얼굴을 한 그 발의 주인을 매정스럽게 쏘아보았다. 자선을 요구하면서지나가는 노인과 고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토큰 하나라도 그들에게 쥐여주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던 기억들을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회상했다. - P92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질주
인규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달리는 일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일등을 하곤 했다.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매일 아침 독신자 아파트의뒷산에 난 등산로를 달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도 그는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규는 계속해서 달리고 싶었다.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고꾸라지고 싶었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먹고 마셔온 것을 모두 토해낸 뒤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싶었다. 인규는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마냥달리고만 싶었다. - P205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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