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클라인 <‘아니요’로는 충분하지 않다>

WTO, FTA, 트럼프주의

원래 "농업은 자유무역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나라는미국이다. 1951년에 미국은 농업조정법을 발동하여 네덜란드 유제품수입을 금지했는데, 가트로부터 위법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내국법에 따라 외국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가트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결국 면제 인정을 받아냈다. 그런데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의 농업규모가 커졌던 것이다. 농산물 수출을 늘려서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줄이는 일이 급선무가 됐다(우루과이 협상이 시작된 1986년 미국의 농업지원 예산은 250억 달러로, 1982년보다 6배 증가해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농산물 자유무역‘이라는 통상원칙을 새로 정립했다. 1988년 처음으로 유전자조작식품(GMO) 판매를 승인한 미국으로서는 이를 자유롭게 팔 수있는 세계 농산물 시장도 절실했다. - P54

‘경쟁적 자유화‘ 독트린이 출현한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이었다. 즉 중국이 세계경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인 2002년에 미국은 WTO와는 별도로 통상원칙을 마련했다는 말이다.
한편 트럼프는 2017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마치 WTO를 끝장낼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세계의 나라들이미국 앞에서 경쟁하게 만드는 원리는 트럼프 정권에서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 배후에 거대한 미국 시장이 있다는 점에서도 변한 것이없다. 경쟁시키는 수단이 달라졌을 뿐이다. 트럼프는 감당하기 힘든 관세로 위협을 한다. 그래서 세계의 제조업 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공장을 짓게 만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FTA에서는 상대국에 작게라도 떼어주었던 미국 시장의 추가 개방이라는 요소마저 사라졌을 뿐이다. 나는 트럼프가 WTO와 FTA를 종식시켰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 - P62

다. 그것들은 엄연히 우리 눈앞에, 이 땅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년 40만t이 넘는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것도 WTO규범이다. 미국산 쇠고기에 애초 40% 부과하던 관세가 내년이면 0%가되는 것도 한미FTA의 효력이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통상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라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수용해야 한다. 반면 미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미국 자신만이 결정한다. 게다가 미국은 그저 더 많은 제품을외국에 팔기 위해 통상규범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미국 기업이 외국에서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은 법 제도 환경에서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미국 통상의 목표이다. 그것을 위한 수단이 1995년의 WTO였고, 2002년의 FTA이며, 그리고 협정문조차 없는일방적 조치인 트럼프주의이다. 이 모두가 살아 있다(바이든의 인도태평양경제협력틀(IPEF)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 P63

‘탈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서 ‘세계화‘는 세계의여러 나라들이 서로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이 힘은 특정국가들에 ‘제재‘를 부과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행사되지만, ‘세계화‘의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도 행사된다. 이러한 권력 행사야말로 제국주의의 특징이다. 세계화된 자본의 패권을만들어내는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제재‘ 역시 가차 없는 제국주의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인 것이다. 즉 이른바 ‘탈세계화‘는 ‘세계화‘를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P69

신자유주의에서 공유지경제로

나오미 클라인은 ‘아니요‘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7)에서, 미국사회는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싸우면서 보수적 우파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녀는 또한, 만약 이 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애초에 트럼프주의가 발생하게 된 조건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상기시킨다. 즉 ‘트럼프에 저항하는 것‘ 이상을 우리는 달성해야 한다는말이다. 그녀는 지난 40년 동안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수많은 곳에서공적, 사적 영역을 이끌어온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이끌어온) 신자유주의의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는 한 우리 삶은 갈수록 더 살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 P71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경제학자들이 ‘호모에코노미쿠스‘라고 부르는것으로 이해한다. ‘경제적 인간‘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개인으로서, 시장에서 자신이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일체의도덕적 속박에서 자유롭고,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동체 및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반도덕적, 반사회적 원자(原)이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보통 추상적 개념으로 여겨진다. 현실 속에서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체 속에서 타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또 도덕적 감정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오미 클라인도지적했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인간형, 즉 호모에코노미쿠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트럼프는 거의 순수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는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이다. 그의 전 존재가 사리사욕 추구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트럼프에게서 신자유주의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놓있는지 직접 볼 수 있고, 바로 그래서 그를 보며 기겁하고 움츠러드는 것이다.
오래전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에서의 이런 경향에 주목했다. 부르주아 시스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기심, 냉담한 ‘현금 지급‘ - P77

이외에는 어떤 관계도 남겨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다음과 같은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원해버렸고, 그리고 파기될 수 없는 공인되어 있는 여러 다양한 자유를 모두 몰아내고 단 하나의 부도덕한 자유, 즉 ‘자유무역‘만 성립시켜 놓았다. 한마디로 착취를 위해서, 종교적·정치적 명분들로 감춰져 있지만실상은 노골적인, 파렴치한, 직접적인, 잔혹한 착취만 남아 있다." 바로이것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자유롭게 풀어놓은 신자유주의 윤리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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