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적 착취와 영국 제국주의

이런 뉘앙스는 섹스가 일종의 공조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확인의징표처럼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정복을 위한 초기 접촉은 피를동반한 전투이지만, 곧 섹스로 이어지곤 하였고, 섹스는 상호간에<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상징인 것이다. 1767년 <돌고래 Dolphin) 호의 선장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이 기록하듯이 <우리 쪽의 젊은 남자들이 아름다운 소녀들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자.> 타히티 섬의 전사들은 곧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식이다. <그들은 곧 이런 식의 물물교환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은 여성이 교환의 대상으로 쓰였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여성은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가 말하였듯이 선물, 대화, 여자를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통해 지배의 정치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매체이다. 30)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유럽이 식민지 여성과의 접촉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이미지로 포장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도덕적 혼란을 최소화할 구실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 P165

그런데 여기서 소년마누라들이 여성의 젠더 역할을 담당하면서도그 구조에 별다른 저항 없이 귀속되었던 배경에는 거부할 수 없는제국주의의 틀이 자리 잡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사례는 자본 - P171

주의와 행정적 집중을 수반한 식민지의 지배자와 피지배민, 흑인에대한 백인의 성적 착취에서 결국 생물학적인 성별보다는 인종적 구분이 더욱 중요하였던 제국주의의 섹슈얼리티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성적 차이가 인종적 차별로 바뀌고, 인종이 성 차별로 바뀌는> 복잡한 식민 관계 속에서도 더욱 독특하게 부각되고, 동시에 제국주의의 섹슈얼리티가 횡적 관계가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수직적 상하 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 P172

19세기의 영국은 비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분명히 성에대해 독특한 관행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결혼 연령이 상대적으로 매우 늦었다. 19세기 중엽 영국 남성들은 평균적으로 29세가되어서야 결혼했으며, 약 10퍼센트를 웃도는 남성들은 평생 독신으로 남았다. 남성들의 늦은 결혼과 독신 생활은 영국에서 매매춘이활발했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의 전통 속에 놓여있던 유럽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남성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혐오 역시 매우 강했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애는 섹스라는 <행위>를 주목하는 개념이다. 이후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섹스가 개입되지 않는 한 남성 사이의 애정은 <동지애>라는 이름으로 폭넓게 수용되고, 때로는 고양되었다. - P173

이런 맥락에서 국내에서 성적 에너지의 <절제>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 대외적으로는 제국의 확장과 유지에 동원되었다는 주장이나오게 된다. 3) <사랑을 잃는 만큼 제국을 얻는다>는 유명한 어구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해준다. 이제 제국의 지배자는 성적 방탕을 즐기는 모험가나 탐험가 혹은 상인이 아니라 <강건>하고 <순결한 신사적 제국주의자인 남성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 P176

흑인 여성의 왕성한 성적 활동이 식민지 지배자에게 색다르고 손쉬운 성적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흑인 남성의 성은 백인 남성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2장에서 살펴보았 - P177

듯이 서구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흑인 남성의강한 성적 능력에 대한 인식이 19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절박한 위협으로 바뀌게 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18세기 말부터시작된 노예제 폐지론의 대두와 19세기 동안 진행된 노예 해방으로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성 접촉을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하였던 사실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흑백 통혼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흑색 공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백인 여성들이 흑인 남성을 선호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위협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위협이 등장한 배경에는 성의 과학화라는 현상과 여성 오르가슴의 발견이 자리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P178

피터 게이Peter Gay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는 태곳적부터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 소설이나 의학 논집의 두드러진 주제로 부상한것은 19세기라고 주장한다. 특히 19세기 후반부에는 공적 영역에서여성의 힘이 드러나면서 남성들에게는 더 큰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성욕과 <오르가슴>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성을 둘러싼 엄청난 권력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르가슴>을 통해 여성은 남성의 성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하며 위계를 매길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지표들은 종종 <도덕>이라는 더욱 강력한 요소에 의해 그 권위가 전복되거나 굴절, 은폐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성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으로 <과학>을 제압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다분히 흑인 남성을겨냥한 <지나치게 큰 성기는 지나치게 큰 성적 욕구를 말해주며,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주장>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가장 큰 주제가 된다. 오르가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의사들도 대중용 결혼 지침서에서는 여성 오르가슴에 대하여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여성의 성욕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폄하해버린다. <여자가 임신하기 위해서는 성적 감흥은 별로 필요하지 않 - P181

다>거나 <창녀와 같이 계속 흥분하는 사람은 임신할 수 없다>라는내용이 이런 맥락에서 강조되었다. - P182

이런 경향은 제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도 항쟁이나 보어 전쟁과같은 <위기>의 시점에서 <위험에 처한 백인 여성>이라는 이미지가96)강화되었던 사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실제로 강간은 영국 군인들이 훨씬 더 많이 저질렀지만, 흑인 남성에 의한 강간의 위협을 경고하는 선전이 오히려 강력하게 대두하였다. 백인 여성이 흑인의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백인 남성은 <신사도>로 무장한채 절제할 줄 아는 남성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신사적> 남성성은 더욱 치밀하게 식민지를 간섭하는 데 동원되었다. 유럽의 기준에서 볼 때 <저들>이 <제대로 된> 남성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문명화된 <우리>가 <그들>을 침략하고 간섭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여기서인종, 제국, 젠더를 둘러싼 식민주의 담론은 분명히 결국 백인 남성의 지배권을 확인하고 유지시켜주는 도구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남성상의 대두는 결국 백인 남성이 성이라는문제를 둘러싸고 완벽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우회하는 차선책을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반증한다. <엄청난 성적 능력을 가진> 흑인 남성과 성이라는 영역에서 경쟁하기보다는 그 구도에서 빠져나와 <도덕성>이라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도피시켜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은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해야 할 것, 그리고 <도덕〉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등한 것이 되어버렸다. 프란츠 파농 Franz Fanon이 적절하 - P185

게 지적하였듯이 이런 구도 속에서 <흑인과 관련한 모든 것은 생식기 층위에서 발생하고, 다시금 <흑인의 정력은 환상적이 되어야만>)하였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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