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로 빠져나왔을 때는 안개가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주변의 모든 사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모든 사물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들판의 출입문과 도랑과 강둑 들이 안갯속에서 내 앞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다른 사람의 돼지고기 파이를 훔쳐 가는 소년이다! 잡아라!"하고 있는 힘껏 또렷하게 소리치는 것처럼 여겨졌다. 풀을 뜯는소들도 똑같이 갑작스럽게 내 앞에 불쑥 나타났는데, 콧구멍으로 김을 뿜으면서 커다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어이, 꼬마 도둑놈!" 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목에 장식용 넥타이 모양의 하얀 반점이 있는 검은 수소가 양심에 찔려 예민해진 나에게 그 모습은 어딘지 꼭 목사님 같은 인상을주었다.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소는 아주 완고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을 뿐만 아니라, 빙 둘러 돌아가려는 나를 따라 자신의 무뚝뚝한 머리를 함께 돌리면서 몹시 책망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울먹이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저씨! 내가 먹으려고 훔친 것이 아니에요!" 하고 소에게 말했다. 그러자 소는 머리를 수그리며 코에서 한 줄기 콧김을 뿜어 내더니,
양 뒷다리를 한 번 높이 내지른 다음 꼬리를 휙 한 차례 휘젓고는 사라졌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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