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엷은 녹색을 넣은 두꺼운 안경알 뒤로, 남자의 눈이 여자의 꾹 다문 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가신다. 그는 굳은얼굴을 돌린다. 짧은 희랍어 문장을 빠르게 흑판에 쓴다. 악센트들을 채 찍기 전에 백묵이 두동강나며 떨어진다. - P11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ㅡ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 P21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 P39
이곳은 지금 깊은 밤이야. 창문을 열어놓고 볼륨을 줄여 네 시디를 들으면서, 이따금 따라 흥얼거리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이곳의 여름밤을 기억하니. 한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엎질러진 어둠. 풀냄새, 활엽수들의 수액 냄새가 진하게 번져 있는 골목. 새벽까지 들리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 뒷산과 이어지는 캄캄한 잡풀숲에서 밤새 우는 풀벌레들. 그 속으로 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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