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다른 사회 정치적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혁명 역시완전한 정의를 향한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장 좋을 때‘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안 좋을 때‘이기도 하다. 이미 형성된 양식들이 도전받는 고통과 격변의 날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과거의 불의와 변화의 규모에 맞닥뜨려 양측 모두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찰스 디킨스가프랑스 혁명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두 가지 묘사 중 하나는, 정의에 대한 요구가 정의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보복적인 감 - P11
정을 발생시킬 수 있고 이것이 결국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 역시 이와 유사한 위험을 끌어안고 있다. 현시대는 여성이 분명하고 당당하게 정의와 존중을 요구하고 말하는 시대인 동시에, 일부 남성들은 공포와 분노로 응답하는, 잃어버린 특권에 분개하고 페미니즘을 그 불만의 근원으로 악마화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평등한 존중을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복에서 희열을 찾는 여성들이일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여성들은 정의와 화해의 예언자적 비전 대신 이전의 압제자들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선호하며, 이를 정의라 내세운다. - P12
1부 투쟁의 현장들
1장 대상화 -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기
성폭행과 성희롱은 심원한 방식들로 자율성과 주체성을 침해한다. 여성들이 동의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짓밟고 무시하거나 위협으로 가짜 동의를 갈취하는 등 여성을 편리한 도구로 취급하며, 남성의 만족감을 위해 여성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편 성폭력은 여성의 감정과 사유를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여긴다. 마치 지배 남성의 욕망만이 실재하고 중요하다는 듯 말이다. 가끔은 설상가상으로 여성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무시가 너무도 깊어서, 위조된 주체성이 여성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남성의 소원과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여성, 예컨대 ‘싫다는 건 좋다는 거야. (no means yes.)‘와 같은 생각들, 여성이 강요된 성적 종속을 즐긴다는 따위의 생각 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성의 여성 지배가 여성을 순종적으로 복종하도록 몰고 가는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JohnStuart Mill)은 『여성의 종속에서 남자들(이 책에서 그는 노예제를통한 비유를 강조하기 위해 남성을 ‘여성의 주인‘이라 부른다.)이여성의 육체만을 통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썼다. 나아가여성의 자발적인 복종까지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남성 - P29
여기서 분명히 하자. 합당한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과 여성의 특권을 부정하는 것은 성차별주의(sexism)와 여성 혐오(misogyny)라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추동된다. 나는 이 용어들을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케이트만(Kate Manne)이 그녀의 저서 『다운 걸: 여성 혐오의 논리(Down Girl: The Logic of Misogyny)‘에서 구체적으로 정의한 맥락으로 사용할 것이다. 나는 만의 분석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고(그 지점은 명확하고 효과적인 두 용어의 개념을 확정하는 것이지 해당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를 점유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의만으로도 두 용어를 실질적으로 사용할 때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있다.) 내 최근작인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이 개념을 확장시켰다. 성차별주의는 여성이 남성보다 구체적인 면에서 열등하다는것을 뒷받침하는 신념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차별주의자는 그 - P37
신념 체계를 이용해서 여성의 참정권과 고등교육 등을 부정한다. 여성 혐오란 그와 반대로 실행 메커니즘이다. 여성 혐오자는 견고한특권 속에 들어앉아 여성을 그 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보여 주는 것처럼, 여성혐오자가 반드시 여성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략은 대부분의 경우 남성 특권의 세계에 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순전한반항심과 이기심으로부터 촉발된다.) - P38
매키넌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대상화라는 것은 너무나도 편만해 있어서 여성들은 대상화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거기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매키넌은 "모든 여성들은 물고기가물속에서 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적 대상화 속에 살아간다."라고 기발한 은유를 사용하여 말하는데, 이는 대상화가 여성들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바로 그 대상화로부터 양분과지속성을 끌어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녀는 이전에 동일한 지적을 한 존 스튜어트 밀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동조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물고기가 아니고, 매키넌에게 대상화란 해로운 것이었다. 대상화는 사실상 여성들에게서 완전한 자기 표현과 자기 결정, 인간성을 빼앗기 때문이다. 이 규범적 개념과스탠턴의 급진주의가 갖는 연관성은 뚜렷하다. 하지만 좀 더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대상화는 무엇이며, 그 중심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 P41
온전한 인간성이 부정당하는 데에는 많은 방식이 있기 때문에 대상화는 집합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을 사물로 다루는 데에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별개 개념, 일곱 가지의 방법이 있다.
I. 수단성 (Instrumentality): 대상을 본인의 목적에 따른 (단순한) 수단으로 다룬다. 2. 자율성의 부정 (Denial of autonomy): 대상에 자율성이나자기 결정이 부재한다고 여긴다. 3. 타성성(Inertness): 대상에 행위자성 및 활동성 역시 부재한다고 여긴다. 4. 대체 가능성 (Fungibility): 대상을 같은 종류의 다른 대상 A, 혹은 다른 종류의 대상 B와 교환 가능하다고 여긴다. 5. 가침성(Violability): 대상에 온전한 경계가 부재한다고 여겨 그것을 깨고, 부수고, 침입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된다고 여긴다. 6. 소유권(Ownership): 대상을 누군가에게 소유되었거나 소 - P42
유 가능한 것으로 여겨 사고팔 수 있다거나 재산처럼 다룰 수 있다고 여긴다. 7. 주체성 부정(Denial of subjectivity): 대상의 경험이나 느낌을 (만약 있다고 해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 P43
페미니스트 래 랭턴 (Rae Langton)을 떠올리며 1995년에 작성한 일곱 가지 목록에 한 가지를 더해 본다.
8. 침묵시키기(Silencing) : 대상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다룬다. - P44
다시 주지하지만,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수단으로 다루고자 하는 결심은 자연스럽게 상상력의 실패로 이어진다. 누군가 한 인간을 수단으로 쓰겠다 결심하기만 하면 ‘내가 X라는 행위를 할 때 이 사람은 어떻게 느낄까?‘,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할까?‘, ‘그 욕망들과 관련해서 내가 X를 했을 때 그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등 주로 도덕성이 좌우하는 질문들을 하지 않게된다. 군주제 또한 이런 게임을 해온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군주들도 하층계급을 인간으로 생각했지만 이 계급에게도 온전한 인간성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있음을 부정해 왔다. 사람들이 더 자각할수록 그들이 군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도록 했던 방식들을 위협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 P47
남성과 여성의 성적 상호 관계에는 애매함과 잠재적 갈등이 따르기는 하지만 몇 가지 오해를 넘어서는 자명한 사실이 분명 존재한다. 섹스가 강요될 때의 인식 속에서 젠더 격차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젠더라는 수렁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원치않았던 성적인 행위를 남성으로부터 강요받았다고 말하는 많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극소수의 남성이 여성에게강요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성과 남성을 젠더 이슈로 몰고가는 차이점과 여성과 남성의 섹스 경험에서 나오는 상이점이보여 주는 사실은 이것이다. 바로 두 가지 분리된 성적 세계, 그의 세계와 그녀의 세계가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 P51
여성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너무나도 쉽게 부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터넷 포르노는 겉보기에도 완전 교환 가능한, 고분고분한 여성을 무수히 재현하고 그 모든 동작과 표현들은 남성의 통제감과권력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여성 재현물들에는여성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여성은 남성의 바람을 충족시키기위해서만 존재하며 남성의 사양에 맞춰 제작된 가짜 주체성만을 띤다. 이는 분명 ‘진짜 세계‘에 여파를 미친다. 그 규모에 대해 누군가 반박할지라도(그리고 누군가는 어떤 포르노는 페미니스트에게 필요하다 주장한다 해도) 말이다." 인터넷 문화 역시 오랫동안 광고나 포르노 인쇄물 및 다른 매체들 속에서 여성을 묘사해 온 방식과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여성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불안할 정도로 차이가 있다. 인터넷 포르노는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완전히 몰두해서 그의 요구에 맞춰 줄 준비가 된, 오로지 재현된 여성만을 바라보는 세계. 오늘날 많은 남성들이 이 세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므로 여성 파트너를 매혹하지 못한 남성들이 늘 있어 왔 - P53
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에만 ‘인셀(incel)‘ 현상이 일어나고,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여성에게서 누렸어야 할 만족감을 여성들이 주기를 거부했다고 믿는 남자들은 ‘실제 세계‘의 여성들이 인터넷 포르노 세계 속여성들처럼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지 않을 때 폭력적인 방식으로 상대를 처벌해도 된다는 느낌 속에서 서로를 지지해 준다. - P54
2장 지배라는 악덕 - 교만과 탐욕
교만은 우리 사회 내 만연한 성적 대상화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 P55
일반적으로 교만은 여성 종속의 근원이다. 이 장의 분석은 궁극적으로 왜 스포츠나 미디어, 사법부와 같이 특히 남성의 특권이지배적인 영역에서 젠더적 교만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교만이 강해질수록 그영역에서 여성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일은 더욱 쉬워진다. 상처받은 교만과 이에 잇따르는 수치 또한 여성에게 피해를 입히는데, 이는 가정 폭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 P56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교만을 훌륭하게 분석한 철학자 중 하나인데, 그는교만이라는 개념을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정념」장에서 가장 먼저 분석했다. (흄은 정반대의 개념도 다루고 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것은 ‘겸손‘이다.)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은 교만에 대한 흄의 논의가 모든 감정을 단순한 인상 및사유 체계로 밀어 넣으려 하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부한인지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흄의 논의는 많은 통찰을 담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교만이란 양쪽으로 향해 있는 사유가 쾌감과 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양방향 사유 중 하나는 객체(당신이 자부심을 느끼는 대상)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자아(당신이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를 향한다. 흄은 전자를 감정의 객체(object)‘라 불렀고 후자를 ‘이유(cause)‘라 불렀다. - P59
흄은 교만이 전 사회적(pre-society) 인간 본성에 뿌리내린 것으로, 주변의 사회 서열에 강하게 영향 받는다고 분석했다. 또한 경쟁적이고 지위에 예민한 사회일수록 더 두드러지게 번성한다고도 보았다. - P61
일례로, 웹사이트 오토어드밋(Auto Admit.com)의 경우 경쟁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벌어졌지만 질투는 여성들 자체에게로 꽂혔다. 이웹사이트는 원래 로스쿨 입학을 조언해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순식간에 포르노 사이트로 타락했다. 이 사이트에 글을 쓰는익명의 남학생들이 여성 법학도들의 이름을 대면서 ‘창녀들‘이라고묘사하며 포르노적인 시나리오들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높은 성취를 보인 동기들을 창녀라고 묘사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우월성을 선언한 데서 그친 게 아니라, 피해 여성들이실제로 구직을 하는 현실 세계에서도 피해를 입었다는 데에 있다. 잠재적 고용주들이 그 이야기들을 믿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피해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트는 심지어 어떻게 하면 해당 여성의 이름이 명시된 위조된 이야기를 구글 첫 페이지에 띄울 수 있는지 조언하기도 했다. 이 사이트는 강의실 내에 긴장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익명의 게시물을 올린 이들은 여성들의 이름과 신체적 특징까지도 알고 있었다.) 실제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예일대학교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던 두 여성은 명예훼손 및 감정적 피해로 가해자들을 고소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큰 장벽이었다. 연루된 많은 이들 중 세명의 남성들만이 추적되었고, 소송에 제기된 이름들은 다 가명이었다. 결국에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그 조건은 밝혀지지 않았다. - P79
대상화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자율성과 주체성의부정을 수반한 수단화에는 깊숙한 내적 근원이 있다. 바로 교만이라는 악이다. 다른 사람들(그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집단들)이 온전하게 실재하지 않고 자아만이 실질적인 시야에 들어와 있으며, 노력의 초점이 된다. 시기와 분노는 교만의 사촌들이다. 인간성이라는 아름다운 비전은 거부하고 본질적으로 자신을 왜곡하는 경향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 P81
단테는 본 적 없는 교만의 먼 친척 중 하나가 오늘날의 병든 젠더 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혐오감과 유사한 특성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비롯한 나의 다른 저서들에서 살펴보았듯이 혐오에는 두 가지 면모가 있다. 1차적 대상물 혐오는 배설물, 오줌, 부패해 가는 시체 및 그와 유사한 성질(안 좋은 냄새, 부패, 질질 흐르는 것, 끈적거림)을 가진 동물 등에 초점을 맞춘다. 진화론적 용어로 [차적 대상물 혐오는 위험을 피하는 태도라고 하지만 혐오가 정확히 위험만을 뒤쫓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알려졌다. 실험 과학자들은 혐오가 (우리와 동등한 동물적 아름다움이나 힘이 아닌!) 동물적인 취약성이나 연약함의 징표, 즉 ‘동물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것들‘의 실체를 겁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이유로 인간 정신은 교묘하게 더 나아간 형태의 혐오를 낳았는데, 지배 집단이 스스로를 육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재현하는 반면 그들이 정의 내릴 수 있는 종속 집단에게는 혐오스러운 특성들(안 좋은 냄새, 과도한 동물성, 과잉 성욕)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간 이하의 인간들이 악취와 신체의 냄새를 형상화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다는것이다. - P82
투사적 혐오는 여성들의 성폭력 증언에 대한 저항의 주요 원천이다. 여성은 보나마나 ‘창녀‘일 것이라든가 ‘보나마나 자업자득‘ 일 것이라는 것.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법적 정의를 추구하는 여성들을 반복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여성들을 단순한 더러움이나 점액질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는 한다. - P84
하지만 단테 역시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 온전히 그들만 탓할 수 없기에 인간의 가능성이 변형된점을 염두에 두고 그 악행들을 해석할 것. 연옥은 자비와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비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교훈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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