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개관
해방기는 "상반되는 문학 이념 간의 혼재와 대결의 사건사이며, 운동사적 성격이 우세한 시기였다. 작가들은 좌우익 문학 단체에 가담하거나 조직의 이념과 정체성을 의식하며 글을 쓰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여성 작가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일부 여성 작가들은 그간의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이념과 정치를 소재로 삼아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여성 작가들은 남성 혁명가나 민중을 서사의 중심에 세워 두거나 남성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글쓰기 관습에 거리를 두는 복장 도착적 글쓰기는 남성을 혁명의 주체로 승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 중심의 문학장에끼어들면서도 혁명에 대한 비판과 의혹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전략이었다. 해방 정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감하고 조직에 대한 내부 고발자의 면모조차 보여 주는 경계인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이다. - P18
해방기 시사에서 여성 시인의 자리는 매우 척박했다. 1930년대를 대표하던 두 명의 여성 시인 모윤숙과 노천명은 일제 말기에친일의 길을 걸었고, 해방 후에는 친일 행위에 대한 치열한 자기반성 없이 시작 활동을 이어 나갔다. 모윤숙은 친일 시를 쓰던 것과 동일한 어조로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공허한 주장으로 목소리를 높였고 노천명은 ‘고독한 나‘를 내세워 현실에서 도피했다. 이렇듯 자기 성찰 대신 기만과 회피의 방식을 택하며 정체성의 혼란을직면하지 못한 이들은 다시 한국전쟁의 격랑에 휘말렸다. 모윤숙은한국전쟁의 경험을 담은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51)에서 반공주의와 애국주의로 무장한 ‘국가‘와 ‘민족‘을 더욱 강하게 내세웠고, 노천명은 친일 부역 혐의를 청산하고자 몇몇 전쟁시에서 애국의 이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노천명은 「적적한 거리」(1949),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1953) 등을 통해 분단으로 헤어져 볼 수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해방이 사실상 분단의 시작이며 민족 회복과 통합이 요원하다는 점을 아프게 환기하는 시편들을발표했다. 친일 부역 행위로 수감되었던 경험을 다룬 「고별」(1951)이나 소박한 행복을 이야기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자신의비루함에 대한 진솔한 응시와 현실 초월의 의지를 드러낸다. 다른 - P21
한편으로 시조시인 이영도 역시 「맥령」(1946)에서 노천명의 해방기시와 마찬가지로 해방을 기쁨이기 이전에 또 다른 슬픔으로 포착한다. 해방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난민처럼 떠도는 동포들에게서 쉽게 치유되지 않는 수난의 시간들을 통감하는 것이다. 드물게도 지하련은 「어느 야속한 동족이 잇서」(1946)에서 식민지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회주의자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 P22
그러나 전후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여성 문단이 처한 곤경과성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정치적 삶과 문학이 일치한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체제 순응적인 여류‘는 사회와 문단의 약자로서 여성 작가들이 선택한 가면 전략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자기 파괴를 자처하기보다는 가면과 변장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문화변용은 약자의 자기 보호술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표층 서사와 이면 서사를 겹쳐 보거나 거꾸로 읽는 암호 풀기식 독법조차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또한 소설에서 강신재, 구혜영, 박경리, 손장순, 전병순, 정연희, 한말숙, 한무숙를 비롯해 시에서 김남조, 홍윤숙, 허영자, 그리고 수필 장르에서 언론인 정충량 등까지 작가층이두터운 만큼이나 다양성과 이질성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또한 ‘여류명사‘로서 문학적 지분을 챙긴 모윤숙, 장덕조, 최정희 등 기성 여성작가와 달리 친일의 행적이나 노골적인 정치적 부역의 혐의로부터자유로운 신진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남성 엘리트나 진보적 이념 주체가 1950년대 여성 작가에게 붙여 준 체제 순응적인 "여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여성 인물과 화자를 알레고리로 보고 여성 작가의 ‘저자성‘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문학은 전후 사회 재건의 과정에서 가부장적 민족의 - P23
경계 바깥으로 내몰린 여성과 이방인의 삶과 존재를 기입하는 거의유일한 장이었다는 점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H&전후 여성문학의 첫 번째 흐름은 식민해방 한국전쟁의 역사 속에서 죽어 간 희생자를 기억하고 이별과 죽음 등 상실의 아픔을 위무하는 애도 주체로서 여성의 출현이다. - P27
두 번째 흐름은 ‘양공주‘를 단순히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하고 민족의 경계를 흔드는 하위 주체로 재현한 것이다. - P27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길」(1957), 정연희의 「천 딸라 이야기」(1960), 한말숙의 「별빛 속의계절」(1956), 손장순의 「전신」(1958) 등 여러 작품에서 ‘양공주‘는해방과 전쟁이 만들어 낸 기형이나 변칙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가부장적 민족 공동체를 심문하는 불온한 하위 주체로 출현한다. - P29
1950년대 여성문학의 세 번째 흐름은 정신병리적인 여성 주체들의 서사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가부장적 민족 재건의 정치가 시작되는 결절점이다. 해방은 신여성 기획을 리부트했지만 가족이 민족 재건의 상상적 구심점이 되면서 여성은 ‘가정의 천사‘로 이상화되고 가정 영역에 고립되기 시작했다. - P31
1950년대 여성문학의 네 번째 흐름은 신연애론, 신정조론 등이부상하는 여성사의 퇴행적 국면에서 실존주의적 주체 의식과 여성지식인을 내세운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다. 세계대전 후 유럽의 철학과 문예계를 휩쓴 실존주의는 <사상계>를 비롯한 인문 잡지나 문예지를 통해 번역 · 수입되면서 1950년대 신세대 작가와 비평가들에 의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 P33
마지막으로 산문 영역에서 여성 작가가 이룬 성취 역시 기억되 - P35
어야 할 것이다. 해방기에 여성 기자로 출발해 1950~1960년대 《여원》 등 주요 여성지에서 대표적인 여성 논객으로 활동한 시사평론가 정충량은 남한 사회의 공론장에서 여성 비평가의 부재를 메꾸어주는 존재였다. 「여성의 지위와 현실」(1955)은 양곡 비료 조작 기업 ‘금련‘의 양곡 조작 업무를 정부 직영으로 전환하며 총 6000명에 이르는 거대한 감원에 착수해, 남 직원에 대해서는 감봉, 견책, 근무성적 불량 근무연한제 등 전형 요령을 설정한 데 반해 여직원에 한해서는 무조건 해고를 감행한 사건을 다룬다. 정충량은 이러한 정부의 결정이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평등권을 외면하고 여성을사회적 희생물로 삼은 사태라고 비판한다.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 여성이 많았음에도 사회가 여성의 가난과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정충량은 본인이 ‘전쟁미망인‘이자 ‘감원 대상‘임을 밝히며 남편 없이 홀로 생계를 꾸려가는여성을 탈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여성‘으로 프레임화하는 사회적 시선에 맞서고,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유도하고자 했다. - P36
최정희
희는 1906년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한의사 집안의 장녀로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첩 살림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중앙보육학교를 어렵게 마쳤다. 신여성 예술가를 꿈꾸어 ‘학생극예술좌‘에 참여하고, 이때 만난 사회주의 예술가 김유영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둔 채 이혼했다. 조혼한 아내가 있는 김동환과의 사이에서 소설가 김지원, 김채원을 낳지만 ‘등록되지 않은 아내‘로, 또 남편이북에 피랍되자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모가장으로 평온함과는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다른 한편으로 최정희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카멜레온처럼 입장을 바꾸며 권력에 순응한 대표적인 여성 명사이다. 1934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지만 전시 체제가 형성되자 친일 행위에 나섰고, 한국전쟁기에는 공군종군작가단 창공구락부에서 활동하며 우익 이데올로그를 자처했다.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소설협회 대표위원 등을 지냈을 만큼 한국문학사에서 최정희는 살아 있는 문학권력이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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