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_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지만 - P412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 P413
전경린_염소를 모는 여자
재경이는 문주의 차에 실려 함께 왔고 미화는 따로 왔다. 재경이는 연애 대장 남편 때문에, 문주는 아직도 혼수 불만을 일삼는 시어머니와 사고뭉치 시동생과 낳아야 할 아들 때문에, 미화는 결벽증 환자인 남편 때문에, 웃음 끝에는 대사가 없을 때 게이지가 올라가는 배경음악처럼 궂은 표정이 완강하게 드러났다가 황급히 감추어지곤 했다. 불행의 얼굴은 가지각색이고 우리가 이루려는 행복은너무 똑같은 얼굴이어서 친구들이 모이면 삶은 더 뻔뻔스러워지는것 같다. 우리는 자주 시계를 보며 조금씩 긴장한 얼굴로 현수를 생각했다. "혼수. 남녀 차별. ‘시‘ 자 붙은 사람들." 모두들 문주 얼굴을 쳐다보았다. "없어져야 할 것들, 잊었니?" "심하다!" 모두들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 P432
"웬 염소야?" 아래층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물었다. 나는 그냥 해죽 웃었다. 돗자리 위엔 사각형으로 접힌 작은 담요가 놓여 있고 그 곁엔 화투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옆구리에 아이들 끼고 하루해 보내기에는 딱 좋다고, 아줌마들은 설거지하고 나면 모여서 화투를 두드렸다. 어서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병든 어머니들은 돌아가시고, 시누이들은 시집을 가고 남편은 승진하라고, 어서어서 날들이 지나 월부금들이 끝나고 대출 적금이 만기되어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바람 든 남편이 늙어 버리고 이유없이 발바닥이 갈라지는 이 건조하고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 버리라고 푼돈들을 가지고 나와 짤랑짤랑 하루를 녹인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하고, 한 달 전에 한 말을 또 하고, 일년 전에 한 말을 또 하면서・・・・・・ 그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무시무시하게 긴 장기 공연의 엑스트라 무리 같다. 남의 연기를 보면서 늙어 가고, 한구석에서 어두운 게임을 하면서 늙어 가는 보류 처분된 삶. 나는 게임이 싫다. 게임의 유일한 진실은 시간을 삼킨다는 것이다. -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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