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날개도 가까이에서 보면
우악스러운 뼈가 강인하게 골격을 만들고

아침엔 늦게까지 잠을 잔다. 어제가 충분하게 멀리 떠나갔다. 우선 보드라운 양말에 발을 넣을 것. 그리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다. 옥상에 올라간다. 머그잔을 들고서.

다세대주택들이 반듯하게 도열한 것을 내려다본다. 호호 불며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사람들을 보고.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더멀어지는 걸 보고. 머그잔에서는 아직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우유 냄새가 올라오고.

양말을 신길
잘했다.
잘하는 게 이렇게도 많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말하는 친구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응한다.

-중략- - P77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
그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야
견디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는지를 더 이상모르므로

되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는 것과
되어본 적 없는 것
상상조차 안 해본 것

울타리를 뜯는 사람의 고독 옆에 서기
전문가들의 거대하고 장엄한 편견 앞에 서서

소진시키기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마음을 무효화시키기
물 흐리기 어깃장 놓기
이면의 이면의
이면을
계속해서 들쑤시기

20년 전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

-중략- - P90

공연

-중략-

본 것들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
정교하게 잔인해지던 사람

이유를 만들어내며 잔인해지던
이유조차 필요 없이 잔인해지던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던 사람

-중략- - P93

머리말

-중략-

i는 치아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에게 수반을 건네받았다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시를 쓰지 마
i는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나는 무엇에 대해 시를 쓰지?
옥상에 대해? 파피루스에 대해?
생일에 대해?
팔짱에 대해?

네가 사라지고 나면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생겨나고
분양문의 플래카드가 창문마다 나부끼고 있어도
아무도 입주하지 않고
텅 빈 건물 복도에서
텅빈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고
시멘트 냄새가 나고
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가 듣고

-중략- - P99

저작

무언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
하나
하나

죽어나가는
이파리들

엉망이 되고 있다는 당혹감보다는
무언가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불길함이 우선한다

기쁜 일에 대해서도
더러운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는걸
하물며

-중략- - P104

해설_김언

i는 사회적인 자아(I)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그럴싸한사람 구실을 하는 자아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타인을기는 역할을 척척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일신조차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서의 자아다. 이런 자아가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역할이 될 수 없다. 그것의 역할은 자신을 지키거나 기껏해야 i를 품고 있는 ‘i+I‘ 혹은 ‘i+I+a’로서의 나를 (위의 시처럼 이상하게 생일을 챙기는 방식으로) 감당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런데 이런 못난 자아(i)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작고 보잘것없는자아에 기대어 시라는 것이 나오고 시인이라는 존재가탄생할 수 있다면, i가 찾아오는 날은 달리 말해 시적인자아가 탄생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자아가탄생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시인 혹은 화자의생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누구의 생일이든 그것을 정하 - P154

는 것은, 즉 i의 방문 날짜를 정하는 것은 시인도 아니고 화자도 아니고 I도 아니고 심지어 i도 아닐 것이다. i는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못 된다. 그럼에도 i의 방문으로 인해 시가 탄생하고 시적인 자아가 탄생하고 시인 역시 그로 인해 탄생이 가능한 존재라면, 위 시의 말미에 나오는 "나는 i 몰래 없는 시를 쓰러 갔다"라는 발언은 여러모로 재고를 요한다. 어찌 보면 i 자체가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갑자기 없는 시 쓰기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P155

김소연의 이번 시집에서는 핵심 이미지에 해당하는그것이 ‘밤‘이다. 단순히 시집 제목에 ‘밤‘이 들어가서도아니고, ‘밤‘이라는 단어가 시집 전반에 걸쳐 엄청난 빈도수를 보이며 등장해서도 아니다. 앞서 얘기해온 ‘끝‘에대한 사유도, 거기서 더 가지를 뻗어가는 얘깃거리도 모두 ‘밤‘이라는 이미지에 촘촘히 엮여 있기 때문이다. 촘촘히 엮여서 하나씩 끈을 풀듯이 풀어나가야 하는 밤을아래의 시에서 만나보자.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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