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도산 선생은 나를 새롭게/나를 힘 있게/내가 나답게, 나는 나로서 일어나 살아가면서 타자들의 주체를 일으켜 세워주는 여립(汝立)의 사랑을 실천하면 나라도 찾고 인간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나로서 나를 새롭게_김인국

문제는 언제나 남이 아니라 나다. 나라가 망해서 식민지 백성으로 쓰라린 고통을 겪을 때 안창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일깨우려 애썼다. 나를 강조하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앞세운 철학은 일찍이 없었다(박재순). 유교전통은 극기와 수기를 말하면서 나를 억눌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교전통은 무아와 멸아를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나를구원자를 믿고 기다려야 하는 죄인으로 대했다. 하지만 도산 선생은 나를 새롭게/나를 힘 있게/내가 나답게, 나는 나로서 일어나 살아가면서타자들의 주체를 일으켜 세워주는 여립(汝立)의 사랑을 실천하면 나라도 찾고 인간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주체의 철학‘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본래 취지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나는 나로서 나로 말미암아‘,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자라나다가 저만 최고로 아는 교만, 이기주의와 야합하는 바람에 아주 못쓰게 되었다. 각자도생은 미래도 없고 사람이 할 짓도 아니니 동고동락으로 살아보자는 목소리를 잡아 죽일 듯 저주하는 게 제정신인 - P174

가. 거짓-나가 참-나를 짓밟고 일어선 결과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2003년의 삼보일배가 예순닷새 삼백이십이 킬로미터였고, 2008년의 오체투지는 일백스무나흘 장장 삼백오십오 킬로미터였다. "땅이 땅에 묻혀 숨막혀 하고(새만금), 물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대운하) 모습을 차마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수경 스님) 나선 두 번의 순례는 망상의 나를 쓰러뜨리고 참다운 나를 되찾으려는 목숨 건 사투였다. 순례자들의그 마음을 오늘 다시 생각한다. - P175

자급을 생각한다(4) 도시살이 생협 조합원의 자급_장병윤

"필요 이상으로 많이 쓰는 것은 도적질이나 마찬가지다. 남의 것을 빼앗는 범죄행위다." 권정생 선생의 말씀이 늘 뒷덜미를 묵직이 누르고 있다. 무언가를 필요 이상으로 소비할때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 P184

소비의 메커니즘을 한번 들여다보자. 거기엔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외부적 자극, 돈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한다. 잉여를 통해 확대재생산해야 하는 자본주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과잉생산-과잉소비를 불렀다. 우리의 소비는 그 틀 속에서 감응하고교화된 채 폭발적으로 질주한다.
오늘 우리에게 자급은 어떤 의미일까. 자본주의체제 아래서 자급한다는 것은 자본의 작동체계에 맞서고 시장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비정한 경제적 가치를 떨쳐내고 공동체적 가치를 앞세워 협동으로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틀을 만드는 게 자급 아닐까. 자급으로 가는 또하나의 길은 물자를 아껴 쓰고 소비를 줄이며 자립의 생활양식을마련하는 것이다. 그 길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풍요와 편리를 내려놓는 데에서 시작된다.
자급은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의 시스템이 아니라 호혜의관계 속에서 공동체적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을 구축할 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생협운동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 P187

이제 죽음을 헤아려야 하는 나이가 됐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요즘의 과제다. ‘좋은 죽음‘ 역시 좋은 삶의 결과이고겸허하게 삶을 마감할 때 가능하다. 생의 말기를 산업화된 의료와 상업적 요양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준비를 하고 싶다. 삶과 죽음이 - P192

명멸하는 자연을 마주하고 우주의 섭리에 따라 마지막을 준비한다면
‘죽음의 자급‘을 이루지 않을까.
상품이 철철 넘치지만 내게 주어진 물질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라도 아끼고 절약하는 일이 자급의 길이다. 자급적 생활은 기후변화의 재앙적인 사태, 극단적 이기주의와 승자독식의무한경쟁, 사회·경제적 양극화 등 우리가 마주한 복합적 위기를 넘는해법이기도 하다. 내가 누려온 편리와 풍요를 내려놓고 불편과 가난을기꺼이 받아들이는 ‘공생빈락‘, 그 가치를 삶으로 실현하는 자급은 우리의 자존과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 - P193

자본주의 다시 보기(2) 명품과 스마트폰과 가치형태_강수돌

러시아혁명 뒤인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생겼다. ILO는 인간노동에 관한 세계 표준을 정립, 노동인권과 함께 자본주의를 수호하려했다. 그래서 ILO는 ‘하루 8시간제‘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란 구호를온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노동인권 보호 취지가 아무리 고상해도, 이 구호는 오류다. 그것은 노동력과 노동의 개념을 혼동하기 때문!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력‘이란 쌀, 가방, 아파트처럼 화폐와 교환되는 상품이다. 반면, ‘노동‘이란 노동력 상품을 구입한 사용자가 그 상품(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으로, 노동력이 생산수단(원료, 기계)과 결합, 새 상품(가치)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노동력은 상품이고, 노동은 행위다. 불행히도 ILO는 이잘못된 구호를 100년 넘게 고수한다.
만일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가 옳다고 고집한다면, 이는 굳이 크게외칠 필요 없는 자명한 것이기 때문! 노동력과 노동을 정확히 구별한다면 저 구호 자체가 무용지물이다. - P197

앞서 2024년 대통령 신년사와 2023년 대법원 판결을 언급했는데, 이역시 가치공식 4를 현실로 증명한다. 즉, 여기서 국가(대통령, 법원 등)는자본의 가치증식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재판부는 충분한 휴식 없이 과로를 거듭하다 죽은 노동자 삶이나 차별적 하청구조는 외면한 채, 오직 자본의 노동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법 해석을 했다.
실은 2023년 마감 대법원 판결이 또 있다. 그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 인근에 ‘왕릉뷰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가 문화재청의 공사중지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인데, 대법원 3부가 끝내 건설사 편을 든 것! 문화재청은 2019년부터 대광이엔씨, 대방건설, 제이에스글로벌 등 건설사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 20m 이상 고층 아파트를 사전 심의 없이 지었기에 문화재보호법 위반이라 봤다. 그러나 대법원의 핵심 논지를 보라! "건물은 이미 골조가 완성됐고, 공사 중단으로 건설사들과 수분양자들이 입을 ‘재산상 손해‘는 막대한 반면, 이 사건 처분이나 이 사건 건물을 일부라도 철거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그에 비해 크지 않거나 미미하다." 이로써 건설사와 법원은 결국 자본의가치증식 동맹체임이 거듭 확인된다.
이렇게 국가는 자본이 가치를 스스로 증식하도록 적극 돕는, 주관적가치형태다. 달리 말해, 국가나 제도와 같은 주관적, 의식적 가치형태없이는 상품, 화폐, 자본은 결코 ‘스스로‘ 증식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자본주의 근대성과 함께 출현한 개인, 사회, 국가, 민족, 제도, 정책 등은 결코 초역사적이거나 ‘원래 그런 것‘이 아닌, 자본의 가치증식 내지자본축적과 밀접한 연관 속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시스템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가? - P200

모든 상품은 백화점 진열 전에 생산돼야 한다. 명품일수록 장인의 손노동을 요한다. 170년 전통의 ‘루이비통‘도 그 신발을 오늘날 유럽에서노동력이 싼 루마니아에서 90% 이상 생산한다. 마지막 단계는 이탈리아 장인노동이 완성한다. 700여 루마니아 노동자들은 매월 20만 원 미만을 받는다(2017년 기준). 이 신발은 80만 원에서 300만 원짜리다. 흔히 우리는 ‘명품‘(가치형태인 상품)이나 그 가격(가치형태인 화폐)에 놀라거나 자랑하지만, 실은 원료 채굴, 생산과 운반, 판매 등 가치사슬에서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들이 뒤틀리는 ‘숨은 과정‘이 있다. 이그늘진 과정과 관계들을 놓친 채 오직 겉모습(명품 상표나 화려한 외양, 비싼 가격)에만 쏠리는 현상이 ‘물신주의(fetishism)‘다.
즉, 물신주의란 상품이나 화폐 그 자체의 외양에만 신경 쓸 뿐, 그 근본배경인 과정이나 관계에는 무관심한, 집단적·객관적 착시 현상이다《고병권의 자본 강의》). 실제로 우리는 명품이나 첨단 기술에 환호할 뿐,
그게 여기 오기까지의 사회적 관계들엔 맹목이다. - P201

서평. 기후위기 시대의 에코페미니즘_노고운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자급’이란 문명을 이용하지 않고 약소하나마 자연이 허락하는 물질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축소‘되고 ‘후퇴‘한 ‘고된‘ 삶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김혜련은 "에코페미니즘이 말하는 자급적 삶"이란 "돈을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과 삶을 위해 노동하고, 사치품을 사들이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자급적 삶은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고 필요의 원칙"(김은희)에 따르는 삶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탈성장이 추구하는 좋은 삶"이다. - P222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확실히 우리는 기후 비상시대에도 여전히 "이 세계의 끝을 상상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는 것이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로 ‘죽어가는 행성‘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급적 삶을 살고, 자급적 사회를이룰 것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하나의 답은 흙이다.
김혜련은 "자급의 삶은 소비를 억제하고 금욕하는 삶이 아니라, 소비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 일어나지 않는, 온전한 삶"이라고 말한다. 그는 텃밭에서 흙과 풀을 만지고 있으면 개별적 존재로서의 내가 사라지고 "거대한 내가", "온생명인 내가 되며, "이런 충만감에는 결핍과 불안이 자리할 곳이 별로 없다고 고백한다. - P223

장우주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먹고 먹히는 "물질적 관계를 통해 서로 얽혀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 P224

사실 다종적 얽힘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 아니다. 근대 유럽 식민주의의 영향하에서 우리는 자연/문화, 여성/남성, 비서구/서구를 나누는 이원론적 존재론과 세계관을 통해 지구 생물들을 분류하여왔다. 축산동물과 야생동물은 타자화, 여성화되어 인간 여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부장제 문명에 의해 구조적 억압을 받아왔다(유서연, 이미숙). 그러므로 인간과 비인간을 이원론의 반대 항에 두지 않고 한 몸 안에 서로얽힌 하나의 존재라고 보는 관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에서는 이미 이 관점을 받아들여서 생물 진화의 단위를하나의 생물종이 아니라 홀로비온트(holobiont), 즉 복합 유기체(생물의몸)와 그들의 공생자(공생 미생물)로 이루어진 공생체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책의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페미니스트 영문학자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횡단신체성 개념을 통해서 생각해본다면, 다종의 얽힘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 지구 생물들은 숨 쉬고, 먹고, 배변활동을 할 때, 그리고 타자와 여러 다양한 방식의 신체 접촉을할 때, 외부 물질이 몸 안에 들어오고 내부 물질이 몸 밖으로 나간다. 횡단신체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신체와 지구행성을 이루는 물질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얽히는 양상을 잘 표현한 개념이다. - P225

에코페미니스트가 제시하는 자급적사회는 자본주의적 정치경제에 예속된 방식의 부의 축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홍자경이 보여주듯이 문화인류학자 애나 칭의 "알아차림의 기술"을 실천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 "인류세 시대의 수많은 오염되고 교란된땅에서 자연/문화 이분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다양한 생물종들의 뒤얽힌 삶의 양식을 알아차리고, 그 얽힘의 삶이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활동에 몸과 마음을 쏟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장우주가 주장하는 "생태적공감"과 "생태적 응답을 통한 다종의 돌봄이기도 하다.
김현미가 제시하듯이 기후위기 시대의 에코페미니즘은 "역사와 현재,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기계의 연결성 및 전체성을 지향한다." 또한기후위기를 모른 척 방관하거나, 기후우울증에 빠져 인간임을 자책하기보다는, 감정의 이동을 통해 기후위기를 완화시킬 실천을 행하고자한다. 생태적 슬픔을 함께 느끼고 애도하는 감정적 연대를 통해 "위기이후의 희망을 기획해나갈 힘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생태적 슬픔은 피해자의 정서가 아니라 변혁자의 분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후위기 시대 지구에서 경험하는 생태적 슬픔과 애도를 다양한 주제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이 감정들을 통해 "응답과 책임의 윤리를 알아내고 행동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 15인의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모양새로, 또는 같은 형태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들어 있다. 우리도 각자의 위치에서 다종적 얽힘을 알아차리고, 생태적 감정을 통해 얻은 희망을 바탕으로 응답의 윤리를 실천하며, 지금 여기에서 자급적 삶을 모색해보자. - P226

서평. 사랑과 혁명을 읽는 시간_김동현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김수영을 모더니스트로 이해하든 리얼리스트로 이해하든 김수영의 시를 읽어가는일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황규관 시인이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의 근대사 그 자체였던 ‘김수영의 현실‘을 이해하는 통사적 읽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P235

김수영 시가 난해한 이유를 황규관은 "김수영 시인이 자신이 처한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고투를 통해 시를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김수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시를 단독적 예술의 발화가 아닌 그가 경험했던 시간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함을 의미한다. - P238

한때 좋은 리얼리즘 시를 썼다고 해서 그게 평생 유용한 신원 증명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 리얼리스트는 단순히 리얼리즘 양식의 작품을쓰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중단 없는 자기갱신을 하는작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한때 리얼리스트일 수는 있어도 온 삶이 리얼리스트인 경우는 드뭅니다. (100~101쪽) - P240

서평. 흙과 생명과 민중에 대한 모심의 시들_고영직
<니들의 시간>

"스테이 홈(stay Home)." 김해자 시인의 시집 《니들의 시간》을 읽으며 ‘스테이 홈‘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 말은 에코페미니즘의 핵심 개념으로 지구라는 집에 잘 머무르자는 의미에서 재(再)거주화를 뜻한다. 그렇다. 물살이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지구라는 집을 떠나 살 수 없다. 그렇듯 김해자 시인은 시집 《니들의 시간》에서 인류세 시대 시의 역할을 고민하며 다른 언어와 다른 시간을 제시하며, 지구라는 집에 살기 위해 다른 사유방식을 지닌 새로운 인간이 탄생해야 함을 촉구한다. 나는 언젠가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한 김해자 시인을 두고 ‘동네지식인‘이라고 명명한 적 있다. - P242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인류세란 "인간적인 것 ‘너머‘의 세계가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의해 점차 변해버리는 불확실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에서 "지구를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절대로 ‘인류‘가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다"라고 강조한다. 나는 이 점에서 인류세라는 표현 대신에 ‘자본세‘로이해해야 한다고 한 제이슨 W. 무어의 인식이 훨씬 더 정명(正名)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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