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축구 경기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내가 아는 영국과 유럽 지명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원정 경기나 스포츠 신문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이고, 훌리건들을 통해 사회학에 대한관심과 현장학습 체험을 갖게 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는 일과, 비판적 시각 없이 온전히 같은 대상을 응원하고 그 소속감을 갖는 것의 가치도 배웠다. 그리고 친구 프록과 함께 셀허스트 파크에 맨 처음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 P105

물론 더비 전에서의 패배는 퍽 아쉬웠지만, 캐롤 블랙번에게 버림받은 것만큼 아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이 아쉬움은 아주아주 나중에서야 느낀 것이다-나와 아스널 사이에 방해물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1968년에서 1973년 사이, 내게 토요일은 일주일을 사는 이유였고, 그 밖의 시간에 학교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빅 매치 하프타임에 나오는 시시한 광고나 다름없었다. 그 시기 동안은 축구가 바로 인생이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인생이었다. 내가 겪은 커다란 사건 -상실의 고통(1968년과 1972년 FA컵 결승전), 환희(2관왕), 야망의 좌절(아약스와의 유러피언 컵 4강전), 사랑(찰리 조지), 울적함(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은 모두 하이버리에서 벌어진 것이다. 청소년 팀이나 이적 시장을 통해서새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런데 캐롤 블랙번이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삶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실재하는 삶이며, 아스널을 통해서 겪는 - P127

삶이 아니라 내가 몸소 체험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알다시피, 그런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 P128

어린 시절의 뚱한 내 모습 그대로인 마이클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3-0으로 지는 상황에서 맥없이 경기를 재개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아스널은 3-2로졌는데, 사실 경기 내용을 보면 두 골이나 넣은 것도 의외였다.) 나는 마이클의 얼굴에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을 보았고, 그 나이 또래 소년들에게축구가 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책은 골치 아파지기 시작하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아직 관심이 끌리지 않을때, 우리가 달리 어디에 마음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이제 하이버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하이버리가 필요 없어졌다. 물론 슬픈 일이었다. 하이버리에서 보낸 6,7년은 내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내삶을 구제해준 시기였으니 말이다. - P132

다시 이날의 경기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이버리에 되돌아와 본 첫경기, 브리스틀 시티 전이 끝나자 나는 속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경기 전 당당하게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던 말콤 맥도널드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아스널은 지난 2년 동안의 모습과 달라진 면없는 것 같았다. 아니, 2부 리그에서 올라와 4년 동안 1부 리그에서 고전했던 브리스틀 시티를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졌다는 사실로 보건대, 아스널의 상태는 한참 더 나빠졌다. 나는 8월의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며 욕을 퍼부었고, 한동안 잠자코 잘 있던 예전의불만이 몸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늘 딱 한 잔만 더 마셔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알코올중독자처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 P140

나는 얼마 전 《여성, 거세당하다》라는 책을 읽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절대절명의 승격 시합이 끝나기 직전몇 분 동안도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여성의 억압에 대해 분개할 수 있겠는가? 또한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3부 리그의 엑서터 시티를 상대로 골을 넣는 것에 더 큰 관심을갖는 남자는 또 어찌해야 할까? 둘 다 전혀 가망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 P160

축구팀들은 대단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서포터에게 슬픔을 가져다준다. 우선 웸블리에서 벌어지는 빅 매치에서 선제골을 넣었다가 지는 방법이 있다. 1부 리그 선두에 올랐다가 침몰하는 방법도 있다. 어려운 원정 경기에서 무승부를 이끌어낸 다음 홈경기에서 지기도 한다. 어떤 주에는 리버풀 같은 강팀을 이기고 다음 주에는 약체 스컨소프에게 지기도 한다. 시즌 중반이 지날 때까지 승격될 것처럼 잘나가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쳐서는 강등되기도 한다………… 이미 최악의 사태는 지나갔다고 안심하는 바로 그때, 축구팀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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