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
아들이든 딸이든 흑인 아이들을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그리하여 자멸로 치닫고 있는 이 괴물의 입속에서 키운다는 것은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이와동시에 저항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살아남지 못할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내려놓는 법 역시 배워야 한다. - P106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아들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보호하고 내 자신의 고통을 던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내아들이 맞고 오자 나는 힘might이 곧 정의라는, 부패한 권력이 우리에게 가장 처음 가르치는 교훈을 아이에게 가르칠 참이었던 것이다. 나는 수세기에 걸쳐 진짜 힘과 용기가 무엇인지를 왜곡해왔던 그 짓을 내가 반복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아니지, 싸우기 싫은데 싸울 필요는 없지. 하지만 어쨌든 싸우지 않은 것에 대해 아이 스스로도 그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은가. 뚱뚱한 아이였던 어린 시절, 깨진 안경을 쓴 채 허겁지겁 도망치던 그때의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즈음 지혜로운 한 여성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조너선에게 당신도 한때 겁먹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나요?" - P110
내가 아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딸에게 전해 준 것과 똑같은 것이다. 즉,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 역시 이런 나를 보고 나처럼 되는 법이 아니라(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답게 사는 법을 터득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려면 그는 세상이 원하는 대로 되라는시끄럽고 유혹적이며 위협적인 외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듣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 P112
에이드리언 리치와의 대화
여전히 뭔가를 분석적으로 사고한다thinking는 게 다른 사람들이나 하는불가사의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서인가요? 당신은 연습해야 가능한? 지금까지 해왔던 그런 방식이 아니라서?
그건 제게 정말 불가사의한 과정이었어요. 또 의심도 있었어요. [분석] 사고‘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많은 잘못을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죠. 다른 한편으로저는 [분석적으로] 사고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 P130
내 감정을 통해 삶에 대해 갖게 된 신념이나 결론이 그런 사고와는 어긋났거든요. 게다가 저는 그 신념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어요. 포기하고 싶지 않았죠. 제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고, 삶 그 자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없었어요. 적어도 내가 배워 온 방식을 통해서는 말이에요. 내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어요. - P131
당신에게 글쓰기와 가르치는 일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제게 가르친다는 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에요.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 같아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가르치는 거예요. 제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것들을 배우게 되니까요. 저는 배우는 동시에 성찰하고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저 스스로에게 떠들면서 가르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죠. 그 시작은 투갈루칼리지에서 있었던 시창작 워크숍이었어요. - P132
알아요. 저도 두려워하며 강의실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제가 가졌던 건백인의 공포였죠. 내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내가 가진 인종차별주의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요.
제게는 저만의 공포, 흑인의 공포가 있었어요. 저는 이 학생들에게 책임감을 느꼈어요. 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이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런 종류의 공포요. 어떻게 말을 할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창작 프로그램의 학생이기도 했던 친구욜란다가 이렇게 얘기해 줬죠. "그냥 나한테 이야기하듯이얘기하면 돼. 나도 학생이고 나는 네 말을 이해하니까." 강의시간마다 모든 게 다 하나하나 새로웠어요. 모든 걸 새로 하는 기분이었죠. 매주, 매일 저는 새로운 걸 배웠어요. 하지만그랬기 때문에 신이 났어요. - P144
이들에겐 거리에서 배운 삶의 지혜가 있었지만, 스스로를 흑인 여성으로서 성찰해 본 경험은 없었지요. 백인을 상대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요. 적이 항상 외부에만 있다는 듯이요. - P151
제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용감하거나 담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도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점이 너무나 많고 취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침묵함으로써 적의 손아귀에 또 다른무기를 쥐어 주어 더 취약해질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어요. 흑인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레즈비언으로 산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에요. - P154
우리가 이 투쟁에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항하는 것, 그러면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에요. - P161
제가 일생 동안 씨름해 온 건 바로 이거 하나에요. 각종 상황들에 대한 내 지각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동시에 바로잡는 법을 배우는 것. 이럴 경우 엄청난 저항과혹독한 심판을 받게 돼요. 그래서 오랜 시간 제 지각과 내면의 앎을 의심했었죠. 그것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거기 걸려 넘어지곤 했어요. - P166
"이 진실의 얼마큼이나 나는 볼 수 있을까 / 눈멀지 않고 /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 고통의 얼마큼이나 / 나는 활용할 수 있을까?" 10 우리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리는 건바로 그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없기 때문이죠. 필수적인 단계를 모면하려고 하니까요. 제가 흑인 학자』에 기고했던글11을 기억하나요? 그 글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한계도 있었어요. 제가 핵심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내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그것이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도 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글에서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어요. 저는 그 글을 계속 읽으면서,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전 흑인 학자』라는 매체가 그걸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나를 붙들어 맨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고, 그건 나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 P167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여성들 사이의 상호 의존은 우리 각자 내가 될 수 있는 자유의 길입니다. 이때 ‘나‘는 여성으로서의 효용 때문에 이용당하는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인 존재로서의 ‘나‘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임be과 능동적인 되기 being의 차이입니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단순히 관용하겠다는 것은 가장 역겨운 개량주의입니다. 이런 개량주의는 우리 삶에서 차이가 담당하는 창조적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짓입니다. 차이는 단순히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polarities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 P476
그래야만 여성들이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두려워하지 않게될 것입니다. 동등한 것으로 인정받는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상호 의존 속에서만, 우리는 그 어떤 지침이 없는 곳에서도 행동할수 있는 용기와 자양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추구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P177
우리에게 생존은, 누가 눈살을 찌푸리든 손가락질을하든, 홀로 서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도구로 그가 만들어 놓은 게임 안에서 일시적으로승리를 거둘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에 위협을 느끼는 이들은 주인의 집을 여전히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생각하는 여성들뿐입니다. - P178
이 무시는 언제 끝날 것인가_제1회 유색인 레즈비언•게이 전국대회 기조연설
따라서 변화를 향한 우리의 움직임은 이와 같은 투쟁 과정에서 습득한 앎의 안내를 받아야 하며, 우리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우리가 얻은 교훈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억압과 분리될 수 없고, 또 그 억압이 모두 똑같은 것도 아니라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움직임은 모두 우리 공동체의 자매형제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교훈 역시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이 이를 알아보는 비전을 지녔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각자의 개별성을 지키면서도 사회 변화를 위한 에너지를 생성하는 데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낡은 분할 통치 전략에 따라 서로를 의심과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사회화되었다 할지라도, 과거의 공포심을 기억하기보다 우리의 미래 비전을존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그 공포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불굴의 개인적 노력과 변화에 대해 고통스럽더라도 검토해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 P187
나이, 인종, 계급, 성
우리 사이엔 인종, 나이, 성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차이 때문에 분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차이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한다. 또 우리가 차이를 엉뚱한 이름으로 불러서 생기는 왜곡 때문에, 이 왜곡이 인간의 행동과 기대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한다. - P195
모든 예술형식 가운데 시가 가장 경제적이다. 시는 가장 비밀스런 형식을 지니며 최소한의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고 최소의 물질성을 띤다. 시는 근무를 교대하는 시간에, 병원 식기실에서, 지하철에서, 여분의 종잇조각에도 쓸 수 있는 예술형식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빠듯한 재정상태에서 소설 [자미: 내 이름의새로운 스펠링』Zami: A New Spelling of My Name]을 쓰면서, 나는 시 쓰기와 산문 쓰기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에게도 문학이 있음을 드러내며 글을 쓰기 시작하자 시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계급, 유색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주요 형식이 되었다. 산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도 필요하지만, 종이와 타자기도 필요하고, 시간도 많아야 한다. - P197
「여성으로서 우리는 어떤 문제는 공통적으로 공유하지만 어떤 문제는 그렇지 않다. 백인인 여러분은 자신의 아이가 자라나가부장제에 합류해 여러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는 않을까 두렵겠지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차에서 끌려 나와 거리에서 총을맞고 죽을까 봐 두렵고 여러분이 우리 아이들이 죽어 가는 이유를외면할까 봐 두렵다. - P202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1968) [남경태 옮김, 그린비,2009]에서 잘 보여 준 대로, 혁명적 변화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억압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이 이식된 억압자의 조각―그것으로 알수 있는 건 억압자들의 전술과 억압자들의 관계뿐이다―에 맞춰져야 한다. 변화는 성장을 의미한다. 성장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날카롭게 벼려 내야 한다.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우리와 다르다고 정의되는 이들과 함께 작 - P209
업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자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정의해야 한다. 흑인과 백인, 노인과 청년,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 모두에게 이것이 새로운 생존의 길이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했고 각자 날을 세워 싸운다 전쟁은 늘 똑같다 우리가 진다면 죽은 행성은 여자들의 피로 뒤덮일 것이다 우리가 이긴다면 모르겠다 우리가 역사 너머 새롭고 더 많은 가능성을 품은 관계를 갖게 될지 - P210
분오의 활용
이 혐오와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혐오는 우리와는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자들의 격분 fury이며, 그 목적은 죽음과 파괴입니다. 분노란 우리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 그 목적은 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性 말고는 모든 차이가 파괴의 요인이라고 배웠습니다. 따라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서로의 분노를 침묵하지도 부인하지도 죄책감에 빠지는 일도 없이 똑바로 직면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단적이며 새로운 일입니다. 이는즉 우리가 공통의 토대에서 만나 차이에 대해 성찰하고 역사가 우리의 차이에 대해 왜곡해 놓은 것들을 고쳐 나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나서 우린 이렇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 P221
여러분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감정 상하지 않도록, 분노로 화답하는 일이 없도록 제 분노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숨긴다면 이는 우리가 그동안 해온 모든 노력을 욕보이며 사소한 것으로치부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분노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 하거나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반응입니다. 죄책감이 변화로 이어진다면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시작점이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죄책감은 무력감, 즉 소통을 파괴하는 방어심리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무지와 현상 유지를 두둔하는 장치, 그 어떤 변화도 막아 주는 최고의 보호책이되는 거죠. - P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