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지키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비 같은 마음으로 경찰이 되었다. 그래도 꿈은 실상을 잘 모른 채 계산 없이 덤벼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P11
형사가 목격하고 감당해야 하는 세상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끊임없이 봐야 하는,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형사는 그 어두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신경과 기운을 범인에게 집중시키고, 현장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끌고가는 힘이 형사의 능력이었다. 호출이 오면 자다가도 뛰쳐나가고, 중요한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며칠이고 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습관이 쌓이고 쌓여서이골 난 것이 형사의 체력이었다. 형사의 체력이란 결코 신체적 능력이 전부가 아니다. 형사의 진짜 체력은 ‘이골이었다. - P15
형사가 기억해야 할 질문의 미학은 관찰과 관용의 마음으로상대를 향해 평가와 편견 없이 묻는 것이다. 질문할 때는 내 개인의 경험치와 기준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르는 것도 질문하면서 알게 되고, 속단하지 않고 물어보는 사이에 상대의 생각을듣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만이 아는 이야기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디테일하게 질문해야 한다. 형사는 내 정답과 확신을 고집하며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함으로써 알지 못했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다그치면 마음이 닫히지만 질문하면 열린다. 형사는 그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 P31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아픔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에게는 햇살 좋은 한낮의 오후가,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암흑의 시간이었다. 피해장소가 이전엔 지극히 안온했던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도 안타까웠다. 늘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던 정류장에서, 집 주변 화단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피해자는 갈 곳이없어진다. 일상이 무너져내린다. 그런데 이 여대생, 대단하다. 범인이 입안에 남기고 간 정액을 물고 2킬로미터를 걸어 경찰서까지 왔다. - P34
"과장님, 어찌 제가 과장님보다 월급을 많이 받겠습니까!" 과장님은 나의 걱정이 아주 어이없는 일인 것처럼 가뿐하게 말했다. "월급에는 야단맞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월급의 크기만큼 야단도 더 크게 맞는 법이고." 그래, 월급에는 야단맞는 일도 포함된 것이로구나. 그때 그말이 왜 그리도 편안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욕먹고 야단맞고 쪽팔리고 무너지고 억울하고…… 그 모든 게 다 우리네 일이지만, ‘내가 꼴랑 이 돈 받고 왜 이런 개망신을…이라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떠는 것과 ‘욕 듣는 것도 내 일의 일부다. 초짜면 이런 야단도 맞지 않는다, 월급 더 챙겨받고 일도 더하니깐 욕도먹는 것이다‘ 내려놓으며 훌훌 가벼워지는 것은, 오늘 벌어진 일은 동일하되 내일은 전혀 다른 나를 만들어낼 것이다. - P85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는 순간 마주하는 두려움이 있다. 형사는 두려움 없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알고도 달려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 P190
수있그 시절 내가 여자 형사로서 수없이 벽에 부딪친 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던 성차별과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하는 세간의 편견만은 아니었다. 편견은 대중 속에서 무리지어있기도 했지만, 개개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보려는 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를 쉬이 탓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안의 편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편견과 고뇌보다는 실제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범죄자와맞닥뜨린 후부터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 가늠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계속 살아내는 것이 결국 내 길임을 깨달았다. 한시도 두렵지 않고 언제나 충만하게 재미있어서 이 일을 계속한것이 아니다. 비밀과 어둠을 품은 모든 사건과 현장과 범인은 언제나 두려웠다. 형사란 이 세상과 사람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자였다. 그 무엇도 속단하지 않고 만만하게 여기지 않으며, 끝없이 덮쳐오는 내면의 두려움조차 끌어안고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 형사였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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