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시간은 날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기어서 기록된 마지막 음절에 다다른다는 『맥베스』의 대사를 일기 어딘가에 적어 놓고 잊어버렸다. 그때는 내 미래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어떤 글자에 가닿을 - P12
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맥베스』의 다음 대사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걸 몰랐던 것처럼. 소리와 분노만 가득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바보천치의 이야기, 그게 바로 인생이야. - P13
1은 내 이름이 각각 ‘Ji Hyuck Moon‘과 ‘Jihyuck Moon‘으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띄어쓰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래 한글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다고,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가 임의로 만들어 낸 규칙으로 인해 7700만명의 한국어 사용자가 고통받고 있는 거라고 설명해야 할까? ‘Hyuck‘이 미들네임인지 아닌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나는 이렇게 썼다. ‘Hyuck‘은 제 미들네임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미들네임이 아니라도 이름과 이름 사이에 간격을 넣을 수 있습니다. 학교 문서에는 시스템상 이름 사이에 여백을 둘 수 없어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그리고 치트키) 말하자면 이것은 ‘문화의 차이‘입니다. - P17
그때는 이 모든 과정이 외국인으로 일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 P18
매일계속되는 야근과(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 밤 12시에 퇴근하면서 ‘내일은 진짜 야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가자‘라고 말하는 부장의습관성 멘트) 매너 없고 감각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는 고단함 때문에 그녀는 늘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이따금씩 집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씁쓸하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 진짜 똥 푸고 있잖아. 아니, 이안나 여사는 어떻게 애한테 그런 저주를 했대? - P38
게다가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이름 중간에 하이픈을 넣는데, 난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빈칸으로 남겨 놓다 보니 이름을 쓰면 미국인들이 자꾸 ‘혁‘을 미들네임으로 착각하는 일마저 생겼다. (그게 바로 다른 한국인들이 하이픈을 넣는 이유였다. 똑똑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름이Ji Hyuck Moon‘으로 적혀 있으니 한국인의 이름 체계를 알지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지(Ji)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름 반쪽이 잘려 나가는 게 싫어서 나는 카페나 음식점처럼 아주 잠깐 내 이름을 공개해야 하는 곳에서는 ‘지혁‘ 대신 ‘조셉‘을 사용했다. 성경 속 인물이니 익숙하기도 하고, 같은 J로 시작하기도 하니까. - P47
그 이름을 전해 들은 할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어디서 그런 생선 장수 같은 이름을 지어 왔냐고 아버지를 타박했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될 거라고, 부모로서 그런 이름을 지어 주는 건 안 될 일이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 웃음 포인트는 할아버지 자신이 생선 장수였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비하했던 걸까? 거기에맺힌 내가 모르는 다른 한과 분노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생선 장수‘이면서 동시에 ‘생선 장수‘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던 걸까? 내 안에 이런 질문들이 생겨났을때 이미 할아버지는 세상에 없었다. 교회 - P50
-그럼 이제 엄만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 자아는 있어. 그게 여민숙이랑 매치가 안 될 뿐이지. 엄마가 쓰러진 이후 지혜의 목소리는 늘 화가 나 있었다. - 너는 알아보지, 그래도? - 몰라, 좀 짜증 날라 그래. 여기서 간호하고 있는 건 난데 내 이름은 못 알아듣고 아들 이름만 부른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전화기 좀 바꿔. 영상 통화라도 하게. 21세기에 국제전화 요금을 내고 있다는 게 말이되냐고. 내 말 알아들어? 제발 쫌! - P53
매일 지나다니는 학교 독문과 건물 벽에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크게 적혀 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아래엔 작은 글씨로 이렇게. "한계에 맞서세요. 독일어를 배우세요." - P65
이별의 순간에 은혜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는 낮이겠네. 여긴 밤이고, 니가 볼땐 어제야. 있잖아, 니가 미국에 간 뒤로는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겠어. 내가 늘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서 그랬나 봐. 넌 어느새 저만큼, 미래에 가 있는데 인생에도 시차라는 게 있을 거고, 오늘 니가 말한 건 우리 사이에 그만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과거의 목소리는 여기까지만 듣는 걸로 해. 어머니한테 잘하고, 안녕. - P69
몇몇은 나 개인의 성향을 문제 삼기도 했다. 술 담배 안 하고 주말에 교회 가는 너 같은 애가 무슨 소설을 쓰냐? 좀 더우아한 빈정거림도 있었다. 네 글은 《좋은생각》 같은 잡지에실리면 딱일 것 같아. 《좋은생각》은 물론 좋은 잡지지만 그시절 나에게 그 말은 모욕적으로 들렸다. 세상에는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너는 절대 아니야. 나를 - P104
모범생이라고, 착하다고, 선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혀 아래에는 그런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노력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벗어나려고, 탈피하려고, ‘진짜‘ 예술가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 그때부터 소설에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고 ‘진짜‘ 소설을 읽고 삐딱한 마음을 품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술자리에 억지로 참석했다. 끝까지 버텼다. 그러면 어디선가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상처성애자들이 나타났다. 네 상처는 뭐야? 너한테 무슨 결핍이 있어? 너 같은 애가 소설 쓸 자격이 있나? 절망적이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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