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의 일처다부

2장 배우자 선택의 미스터리

다윈은 그런 ‘이차적인 성적 특성‘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제안을 했다. 하나는 암컷을 앞에 두고 수컷 대 수컷이 벌이는 싸움으로, 장수풍뎅이의 초대형 뿔처럼 규모가 큰 무기로 이어졌다. 다른 하나는 암컷의 배우자 결정권이며 공작새 꼬리와 같은 화려한 장식이 진화하게 되었다.
"이는 다양한 예로 보여졌다……… 암컷은 비록 비교적 소극적이지만 대개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잘 행사하고 특정 수컷을다른 수컷보다 선호하여 받아들인다. 다윈은 계속해서 그런 변덕의 전반적인 효과를 설명한다. "더 매력 있는 수컷을 암컷이 선호하기 때문에 수컷이 변화한다. 종의 존재와 양립하는 한 오래도록 시간제한 없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는 성선택을 자연선택의 하위 분류로 취급하긴 했어도 암컷과 짝지을 권리를 두고 수컷들이 대결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윈이 물의를 일으킨 부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율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진화를 좌 - P85

지우지하는 결정권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마나님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준 것으로 대부분의 (남성) 생물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 P86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세울 때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패트리셀리 역시 구애를 수컷과 암컷이 흥정하여 거래를 성사하는 과정으로 강조하고, 그에 합당한 개념의 틀을 세우기 위해 협상의 경제 모델로 눈을 돌렸다.

*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증가에 대한 논문으로 잘 알려진 영국 사회경제학자로, 번식을 억제하지 않는 한 인구는 언제나 식량 공급을 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상은 다윈이 진화를 추진하는 힘을 탐색할 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맬서스를 접하기 전에 다윈은 생물이 어디까지나 개체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만큼만 알아서 번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연구를 읽은 후 인간사회에서처럼 동물의 개체군도 적정한 수준보다 넘치게 번식하여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그 결과 생존자와 패자가 갈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주요 원동력이 된 것이다. - P95

수컷 새틴정원사새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한 어느 2009년 연구는 인지 능력이 짝짓기 성공과 연관 있으며 암새는 가장 똑똑한 수새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낸 사랑앵무 수컷이 암새에게도 좀 더 매력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암컷의 선택은 수컷의 몸과 행동뿐만 아니라 두뇌에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윈 역시 성선택으로 사람 - P96

의 인지력이 크게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예술, 도덕, 언어, 창의력처럼 ‘자기표현‘이 강한 행위에서 영향력이 더 두드러진다. 하지만 여성의 선택이 인간의 두뇌를 명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빅토리아 시대 가부장적 과학계의 급소를 가격하여 치명타를 입혔을 것이다. - P97

3장 조작된 암컷 신화

"바위종다리처럼 살아라. 암수가 서로에게 충실하기 짝이 없으니."라고 1853년에 목사 프레데릭 모리스Frederick Morris는 부르짖었다.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열성적인 조류학자이자 새에 관한 유명한 책을 쓴 작가로 사람들에게 ‘소박하고 가정적인‘ 유럽종다리 Prunella modularis"의 수수한 생활방식을 따르도록 격려했다. 이 선량한 목사는 실은 자기가 여성 신자로 하여금 가정을 꾸리기전에 밖으로 나가 연인을 찾고 두 마리 수컷과 250회 이상 짝짓기하도록 종용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바위종다리 암컷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처음으로 기록한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물학자 닉 데이비스Nick Davies가 풍자조로 쓴 것처럼 목사의 조언은 ‘교구에 대혼란‘을 가져왔을 것이다 - P116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결과 한 둥지에 있는 알의 아비가 모두 다를 수 있다. 수컷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종일수록 암컷이 외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최근 버키드는 성적 이형이 큰 종일수록 부정을 크게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 P117

"명금류는 #미투 운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고와티의 말이다. "암컷의 협조 없이는 물리적으로 수정이 불가능하거든요."
그 후로 10년 동안 조류 친자 연구의 광풍이 불면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들이 해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남성 중심) 조류학계의 눈에 암새들은 여전히 정숙하기만 했다. 어쨌든 다윈-베이트먼-트리버스가 말한 원칙에 따르면, 암컷은 다수의 짝짓기로부터 얻을 게 없고 잃을 것뿐이다. 사회적 배우자에게 들키기라도하면 불륜을 저지른 암컷은 버려지거나 심하게는 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강간이 불가능한 상태인데도 암 - P119

새는 제 씨를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수컷들의 생물학적 특권에 억지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심지어 팀 버키드 같은 조류학자도 암새가 강제적인 혼외정사로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으며, 어떻게 암새가 수새를 꼬드겨 한 배우자하고만 짝짓게 하는지를 두고 논쟁했다. - P120

성적으로 거리낌 없는 명금류 암컷은 행동생태학계를 뒤흔든 ‘일처다부제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만 확인되었다.
"수 세대의 생식생물학자들이 암컷은 성적으로도 일부일처성이라고 가정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틀렸다는 게 명확해졌다." 2000년에 출간된 『난교Promiscuity』에서 팀 버키드가 이렇게 인정했다. - P122

이제는 허디의 친부 혼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주류 학계의 사고에 통합되고 있다. 오늘날 수컷의 영아 살해는 영장류사촌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51종의 영장류에서 의심되거나 실제로 목격되었다. 대부분 외부에서 침입한 수컷이 번식 시스템에 진입할 때만 살해를 시도하며, 특히 젖을 떼지 않은영아들이 타깃이다. 같은 패턴이 수사자에서도 보이는데 알파 수컷이 새로 무리를 장악하면서 새끼 사자를 죽인다. 요약하면 앞에서 내가 실수로 유혹했던 암사자는 생물학적으로 나와의 섹스를 강요받은 셈인데, 그건 내 작은 으르렁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내가 자신의 아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31

허디는 전반적인 영장류에서 수컷이 자신의 새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새끼를 돌보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명백한 사실은 수컷은 오로지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새끼만 돌보기 때문에 일부일처가 암컷에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흔한 가설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런 생각은 도시의 사무실에서 질이나 하는 남성 포퓰리스트 베스트셀러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유행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야외에 나가 암컷 영장류의 야생적인 - P132

행동을 관찰한 인류학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허디는 바바리마카크와 개코원숭이 연구에서 성욕이 왕성한 암컷들이성을 이용해 복잡한 친자 관계의 그물로 다수의 수컷을 끌어들인사례가 보고되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수컷들은 평상시 다른 수컷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다니며 보호했다. 우리 조상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임신과 상관없는 성적 행동은 수정의 빈도를 증가시키지는않더라도 어린 새끼의 생존율을 높였어요. 그러니까 암컷에게는궁극의 번식 전략인 셈이죠." 허디의 말이다. 허디는 어미 쪽의이런 일처다부 전략이 우리의 사람과Hominidae 선조들처럼 이례적으로 생장이 느린 영아를 긴 세월을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서 특히 유용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 P133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정자 경쟁이다. 큰 고환은 정자를 더 많이 생산하여 암컷의 생식관을 가득 채우고 다른 정자가 쌓이지 못하게 막거나 먼저 들어간 다른 수컷의 정자를 깨끗이 씻어낸다. 실버백은 제 근육의 힘으로 애초에 다른 수컷이 하렘에 접근하지못하게 막아 암컷들이 오로지 그에게 충실하게 만든다. 반면 침팬지 암컷은 임신할 때마다 여러 수컷과 500~1,000번을 교미한다. 이런 바람기의 물리적 결과가 바로 체격과 비교하여 고릴라보다열 배나 더 큰 침팬지 수컷의 고환이다. 경쟁자의 정자를 쓸어내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궁금해하는 인간의 고환은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 P135

베이트먼의 연구를 둘러싼 논쟁은 확실히 정치적 사안이 되었다. 패러다임의 토대는 빅토리아 시대의 쇼비니즘에서 구축되었고 페미니스트 과학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는 양극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견고한 과학도 힘을 쓰지 못할 수 있다. 고와티는 자신의 개방적인 정치적 태도가 방해되어 자신의 논문이 널리 읽히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꼭 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몇 년 전 앤절라 사이니 Angela Saini가 과학에 만연한 성차별을 기록한 책 『열등한 성』을 집필하면서 트리버스를 인터뷰했을 때, 트리버스는 고와티의 ‘그 대단하신 논문‘2을 읽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오늘날 여전히 베이트먼의 패러다임을 가르치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고와티의 비판적 연구는 ‘정치색이 강하다‘는 이유로 추천 독서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세라 플래퍼 허디는 "실증적 태도를 가진 생물학자들은 F로시작하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물론 자신들의 가정이 얼마나남성주의적이고, 자신들의 다윈주의적 세계관의 이론적 근간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는 간과하고 있지요." - P144

베이트먼은 성역할을 고정된 것으로 보았다. 까다롭고 소극적인 암컷 대 무분별하고 경쟁적인 수컷으로. 그러나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림에서 성역할은 과거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할 뿐 아니라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사회적, 생태적, 환경적 요인, 그리고 심지어 무작위적 사건 모두 그 성격을 결정하는 힘이 있다. - P145

4장 연인을 잡아먹는 50가지 방법

다윈의 시대에 번식은 양쪽 성이 합심하여 다음 세대를 창조하는 조화로운 과제로 여겨졌다. 이런 낭만적 사고방식이 오늘날에는 다소 예스럽게 보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동물계 전체에서 암컷과 수컷이 합의할 수 없는 성적 의제를 들고 빈번하게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사랑은 전쟁이고 성적 갈등은암수 간에 적대적으로 작용하는 주요 진화적 힘으로 이해되고 있다. 남녀가 서로를 속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립하는 이해관계의 줄다리기는 적응과 역적응의 진화적·군비경쟁을 유발한다. - P155

부인할 수 없이 매력적인 이 광경은 공작거미 수컷이 목숨을 걸고 추는 춤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많게는 구혼자의 4분의 3이 암거미의 마음에 들지 못해 끝내 잡아먹힌다. 연민을 자아내는 위풍당당함이 이 작은 오스트레일리아 거미를 뜻밖의 인터넷 스타로 만들었다. 그룹 비지스의 <Staying Alive(살아 있어야 해)〉를 배경으로 한 수거미의 만화경 같은 구애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달성했다. - P163

성적 동족 포식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 생물학자들의 편협한 시야에 혼란을 야기했을지 모르지만, 암컷의 관점에서 보면 교미 중이나 전후에 연인을 잡아먹는 행위에는 분명한 진화적 이점이 - P170

있다. 어미는 자식을 위해 최고의 유전자를 원하고 또 새끼를 보살피려면 자신도 크고 건강해야 한다. 구혼자들을 잡아먹을 능력이 되는데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 P171

인간은 뱃사람을 잡아먹은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는 여성의 성적 동족 포식에 오랫동안 사로잡혔다. 저들은 궁극의 팜파탈이며 탐욕스러운 성적 욕구와 지배욕을 가진 특별한 여성은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다. 남성우월주의와 성적 능력의 ‘자연적 질서‘를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매혹과 고정관념의 응어리가 과학에 쉽게 스며들었다. 암컷의 동족포식 현상을 기록한 많은 과학 논문에 사용된 언어를 조사한 한 최근 연구에서는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고부하‘ 언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비난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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