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세는 우리가 올레에게 물어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올레 역시 에베와 의견이 같아서다. 지금 이 순간 남자들은 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이질적인 생명체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종양처럼 달라붙은 점액 덩어리가 몸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기 시작할 수도 있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장기 같은건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 P113

나는 에베와 모르텐을, 피와 구역질과 열기로 가득한 이 여자들의 세계 한복판에 머물러 있던 그들의 적막한 표정을 떠올린다. - P126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잠에서 깨어 가방에서 연필한 자루와 종이를 꺼내고는 희미한 야간등 불빛 속에서 시를 쓴다.

약하고 두려워하는 이와 함께
피난처를 찾은 이여,
너를 위해 자장가를 부르네
밤과 낮 사이에…….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어둡고 빛바랜 복도에는 희미한 흔적 하나가 남아 있다. 마치 젖은 모래 위에 찍힌 어린아이의 발자국 같은. - P129

그리고 5월 5일이 찾아온다. 해방의 날. 거리에는포석 사이에서 솟아난 듯한 군중이 환호를 보내며 기뻐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자유의 노래를 소리쳐 부르고, 레지스탕스 전투원들을 실은차가 지나갈 때마다 만세를 부르며 환호한다. 에베는CB 유니폼을 전부 갖춰 입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된다. 독일군이 전투 없이 철수할지 그렇지않을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위층에 있는 리세와올레네 집에서는 마지막 풀리무트 술병들이 책상 위에놓인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 있다. 우리는 춤을 추고 축하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은 내 의식 속에 정말로 스며들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시간이지난 뒤에야 그것을 정말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나는현재를 살아가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등화관제 커튼들을 뜯어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짓밟는다. 우리는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투티는 여전히 모르텐 때문에 슬퍼하고 있고, 리세 - P135

와 올레는 떨어져 지낼 예정이며, 시네는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르네를 막 떠난참이다. 언제나 남자를, 그러나 잘못된 남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 나디아는 에베의 형인 카르스텐을 만나 보려고 애쓰고 있다. 나디아는 카르스텐이 하고 있는 코걸이처럼 그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했던 임신 중단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몇 개월이 되었을지 계산하면서. 우리는 각자 어딘가가 조금씩 망가져 있고,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우리의 청춘도 막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던 헬레와 킴이 갑자기 크게 운다. 그 소리가 우리의 대화 너머로 쏟아지자 리세가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노래를 불러서 그 애들을 다시 재운다. 바깥 하늘에서는 봄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우아하게 매달린 달은 술에 취해 녹초가 된, 차마 자리를 떠나 집에 가지 못하는 군중들을 지켜본다. - P136

나는 그 전쟁터를 떠나 자전거를 타고 집에 있는에베에게 돌아간다. 내가 밤새 안 들어오는 바람에 그는 몹시 화가 나 있다. "아마 다른 사람이랑 잤겠죠." 그가 말한다. 나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걸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여긴다는 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종류의 충실함도 많은데 말이다. 자러 가던 나는 문득 페서리를 삽입하는 걸 잊어버렸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임신 중단을 한 뒤로는 무척 조심해 왔었는데 말이다. 그 걱정은 새로운 생각으로 이어진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최소한 그 남자는 의사니까 지난번보다는 쉬울 거라고. - P141

"자고 갈래요?" "그럴게요, 앞으로 평생 동안" 그는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 아내는요?" 내가 물었다. "사랑이라는 법률은 우리 편이에요." 그가 말했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 법이 우리한테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힐 권리를 주는군요." 우리는 사랑을 나눴고, 거의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 P240

우리의 욕망은 충족되자마자 또 다시 되살아났고, 아이들은 다시금 야베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사랑에 있어서 끔찍한 점이 있다면 그거예요."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다는 거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항상 엄청나게 고통스러워지죠." 어느 날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내게 오더니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옷가지와 책들만 달랑 가지고 우리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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