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아동기를 없애자

여성 억압의 핵심은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의 역할이다.
핵가족과 근대 학교교육이 아동기 형성에 미친 영향
미소 거부!! Smile Boycott
아동기 행복의 신화
아동기 억압의 요소 - 1) 육체적/경제적 의존 2) 성적 억압 3) 가족의 억압 4) 교육적 억압


5장 인종차별주의: 남성가족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의 확장
인종가족: 오이디푸스-엘렉트라콤플렉스로 설명하는 인종/성 관계
흑인의 남성성

4장 아동기를 없애자

여성들과 아이들은 언제나 바로 연이어서 언급된다.("부녀자들은 요새로!") 여성들이 아이들과 가지는 특별한 유대는 누구나 인식한다.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이 유대의 본질이란 억압을 공유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게다가 이 억압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또 서로 복잡한 방식으로 강화하므로 우리는 아동해방을 논의하지 않고는 여성해방에 관해 논의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성 억압의 핵심은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의 역할이다. 그리고 또한 아이들이 이 역할과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그 관계에 의해 심리학적으로 형성된다. 그들이 성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와 그들이 어떤 종류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가 그들이 궁극적으로 건설할 사회를 결정하게 된다. - P109

따라서 17세기까지 아동기는 새롭고 유행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리에스는 어떻게 도상학이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는지 역시 보여준다. 예를 들면 성모마리아의 팔 안에 있는 아기처럼 어머니-자녀의 관계를 찬양하는 묘사의 점진적 증가, 혹은 이후 15~16세기에 개별적인 아동의 초상과 아동기의 소지품 등을 포함하는 가정 내부와 가족 정경에 대한 묘사가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것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도 ‘아동기‘의 이념을 발전시킨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아이들의 순수성과 ‘순진무구함‘에 관한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악에 노출될까 염려하기 시작했다. 여성 존중처럼 아동 존중‘은 여전히 더 큰 사회의 일부였을 때인 16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명백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형성하는 지금에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들의 소외와 분리가 시작되었다. 아동중심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가족은 끊임없는 감시를 수반했고, 초기의 모든 독립성은 없어졌다. - P118

소녀들의 복장은 어떤가?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동기는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배내옷에서 곧장 성인 여성의 복장으로 간다. 그녀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아동기를 구조화하는 제도인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홉 살이나 열 살 때쯤 그녀는 말 그대로 ‘작은 숙녀‘처럼 행동한다. 그녀의 행동은 성인 여성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빠르면 열 살이나 열두 살 정도인 사춘기에 이르자마자 그녀는 훨씬 나이 많은 남성에게 시집 보내진다.
아동기의 계급적 기초는 이렇게 드러난다. 즉, 소녀들이나 노동계급의 소년들이 옷으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성인 역할이란 상층계급 남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유에의 통과의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소녀들은 성장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으므로 복장의 변화를 겪을 이유도 없었다. 성인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하층계급 - P120

에 속했다. 오늘날까지도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복장 제한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인 모델들 역시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중·상층계급의 소년들은 일시적으로 여성과 노동계급의 지위를 공유하지만, 그들은 점차 이러한 예속된 계급으로부터 빠져나와 상승하게 된다. 반면 여성과 하층계급 소년들은 거기에 그대로 남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억압적인 여성 복장의 종식을 논했을 때 어린 소년들의 복장의 여성화가 폐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자의 의복 스타일은 계급적 종속과 여성 역할의 열등성과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공자Little Lord Fauntleroy』는 페티코트petticoat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나의 아버지도 긴 바지를 입은 첫날을 기억하지만, 오늘날까지도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한 복장의식의 풍습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 P121

학교의 이데올로기는 아동기의 이데올로기였다. 이데올로기는 아이들에게 ‘훈육‘이 필요하다는 가정, 특별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하는(아동심리학, 아동교육 등) 특수한 존재라는 가정,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능한 한 그들끼리, 같은 나이끼리 제한되도록 특수한 공간에 모아야 한다는 가정에서 작동했다. 학교란 아이들을 사회의 나머지로부터 효과적으로 격리시킴 - P128

으로써 아동기를 구조화하는, 그리하여 성인기로 성장하는 것과사회에서 유용한 전문화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였다. 그 결과 그들은 점점 더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가족 간의 유대가 파괴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 P129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계급 억압은 ‘귀여운‘ 어법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공개적인 억압보다 투쟁하기가 더 어렵다. 어떤 아주머니가 노골적으로 칭찬하거나, 혹은 낯선 사람이 등을 토닥거리며 까르륵거리는 아기 소리를 낼 때 아이가 무어라고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사생활을 마음대로 침해할 때 어떤 여성이 찌푸릴 수 있겠는가? 만일 "아가씨, 오늘 아주 좋아보이는데!"라는 그의 말에 그녀가 "당신을 몰랐을 때보다는 좋지 않아요"라고 반응한다면, 그는 "저년이 미쳤나?"라고 투덜대거나 더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친절한말의 진정한 본질은 종종 아이나 여성이 웃어야 마땅한데 웃지않을 때 드러난다. "더럽고 늙고 천한 년. 네가 주둥이에 미소를 띠고 있어도 나는 너랑 자지 않을 걸!" ・・・・・・ "버릇없는 놈. 내가 네 아버지라면 무엇이 널 때리는지도 모를 만큼 널 흠씬 때릴 거야!"……… 그들의 폭력성은 놀랍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들은 여성이나 아이가 ‘상냥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여성, 아동, 흑인 또는 노동자가 투덜댄다는 것을 아는 것은 - P131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피억압 집단도 그들의 억압을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비록 속에서는 화가 솟구치더라도 미소를 띠며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웃는다는 것은 아동과 여성에게는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the shuffle과 마찬가지이며 또한 희생자가 그의 억압을 묵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 P132

내 경우, 모든 10대 소녀에게 있어서의 상습적인 신경경련과 같은 가짜 웃음에서 벗어나도록 나를 훈련시켜야 했다. 훈련은 실제로 진짜 웃을 일에만 드물게 웃고, 따라서 웃을 일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내가 ‘꿈꾸는‘ 행동은 미소 거부 smile boycott이다. 그것을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곧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론 오직 무언가 그들을 즐겁게 할 때만 웃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동해방은 아동 자신이 반기는 것이 아닌 모든 귀여워함에 대한 종식을 요구할 것이다.(물론 이것은 귀여움 일반이 더 이상 불쾌한 것이 아닌 사회를 예견할 것이다. 현재 아이가 받는 유일한 애정표현은 흔히 이런 것뿐이어서, 그는 없는 것보다는 여전히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많은 남성들은 그들이 쉽게 느끼는 친밀감이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동이나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인격이 그들에게 귀여움을 받는다거나 주목받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해본적이나 있을까? 어떤 낯선 사람이 길거리에서 비슷한-등을 토닥거리거나, 까르륵거리며 아기 소리를 내거나, 아기에게 하듯이 어르는 방식으로 그의 직업이나 ‘남성성‘에 대한 존중 없이 접근했을 때 그가 느낄 당황함을 상상해보라. - P132

근대 핵가족의 등장은 그것의 부속물인 ‘아동기‘와 함께 짧은 기간의 의존에 불과했던 것을 확장하고 강화시킴으로써, 또한 일반적인 방식들―특별한 이데올로기, 고유한 생활방식, 언어, 복장, 예법 등을 발달시킴으로써, 이미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집단에 씌워진 올가미를 졸라맸다. 아동의 의존성이 증가하고 과장되는 것과 더불어, 여성의 모성애로의속박 역시 그 한계로까지 확장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은 이제 형편없는 한 배에 탔다. 그들의 억압은 서로를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자녀 출산의 영광, ‘자연적‘ 여성의 창조성의 숭고함의 신화에다 이제는 아동기 자체의 영광과 자녀 양육의 ‘창조성‘에 관한 새로운 신화까지 첨가되었다. ("여보,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더 창조적인 게 어디 있겠소?") 이제 사람들은 역사가 증명해온 것을 잊어버렸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과마찬가지이다. 아이를 기르는 최선의 방법은 그만두는 것이다. - P133

다시 라이크를 인용해보자.

나는 거의 네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닥쳐 Shut up"라고 생각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소년이 부모가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목격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혼하겠다며 협박하는 것을 들었다. 다음날 그가 학교에서돌아왔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아직 이혼 안 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어머니가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실망했던 것을 나중에 기억했다.

아홉 살난 소년을 야영장으로 방문한 아버지가 소년에게 집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소년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른 소년들은 집에 가고 싶어 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몇 명만요. 집에서 개를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요"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일화들에서 재미있는 것은-실제로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라면가학적인 지옥 같은 가족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어린이들의 솔직함이다. - P144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모르면서 외국으로 처음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동기를 경험한다. - P150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좁은 삶에 대한 규제에 직접 비례하는 소망-환상wish fantasy의 부담을 지고 있다. 자신의 육체적 불충분함과 우스꽝스러움에 관 - P150

한 불쾌한 감각, 경제적 의존이라든가 그 밖의 것("엄마, 이거 해도돼?")에 관한 끊임없는 수치심,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무지와 관련된 모욕감 등이 그것이다. 아이들은 깨어있는 매 순간 억압당한다. 아동기는 지옥이다. - P151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던 것 때문에 아이를 죽이고 싶어하는 엄마(흔한 욕망)는 아이가 그녀처럼 무력하고 그녀처럼 같은 억압자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그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면 그녀의 증오는 바깥으로 향해지고 ‘모성애‘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단계는 완전한 인간조건human condition으로 가는 길을 열면서, 현재 억압된 자들의 동맹을 맺게 하는 여성성과 아동기 자체의 조건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P152

5장 인종차별주의: 남성가족의 성차별주의

진짜로 백인을 긴장시켰던 것은 흑인의 남성성 자체가 아니라 남성성이 행동에서 의미하는 것, 즉 권력이었다. 흑인 남성은 이제 남성 권력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백인들이 가진 것들을 원했다. 더 이상 탭댄스만 추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인 남성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고 무장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것은 남성 대 남성, 한 (무장) 세력 대 다른 세력의 문제였다. 그들은 기뻐하며 전선을 가다듬었다. - P156

이 장에서 나는 인종차별주의는 성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개인의 정신에 있어서 성차별주의처럼,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를 가족의 권력 위계질서와의 관계에서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서적 의미에서, 인종들은 남성 가족의 다양한 부모들과 형제자매들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성적 계급의 발달에서처럼 인종의 생리학적 구별은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에 기인할 때만문화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 P157

그래서 백인 여성은 흑인 남성과의 대리적인 동일시와 신경증적인(그러나 진짜가 아닌) 성차별주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경향이 있다. 급진적인 여성들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남성 일반을 향한 의심스럽지만 믿어보는 것benefit of the doubtism 으로부터 고통받는데, 특히 흑인 남성을 신뢰하고 동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흑인 남성이 그들로부터 개인적 이익을 취할 때나, 흑인운동이 여성의 대의를 지지하기 충분할 정도로 빨리 움직이지 않을 때 쓰라린 환멸을 느끼곤 한다. - P160

게다가 그녀의 소유자인 백인 남성에 관한 맹렬한 증오와 질투 때문에, 그는 ‘백인놈whitey 이 되기 위하여 정복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그녀에게 강한 욕망을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백인 여성 안에서 더 명백한 양극화된 감정과는 달리, 백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느낌은 사랑과 - P160

증오가 극도로 혼합된 양가적ambivalence 감정으로 특징지어진다.그러나 그가 이 양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 강도를 제어할 수는 없다. - P161

그 둘 모두는 공적 소유냐 사적 소유냐 사이의 선택의 여지밖에는 없는데, 각자가 상대편이 무엇인가를 훔쳐 달아난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에 양쪽은 자신들의 좌절을 진정한 적인 ‘남성‘에게가 아니라 서로에게 잘못 쏟도록 속임을 당할 수 있다. - P165

그러므로 모든 미국의 가족은 흑인 빈민가 매춘 지역의 실존을 예측한다. 성적 매춘 일반이 존경받는 중산계급 가족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흑인 사회의 강간은 더 큰 백인 사회의 가족 구조의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 흑인 사회는 백인 가족의 성적 욕구를 공급하면서 그것의 기능을 유지시키는 외집단outgroup이다. 그것이 빈민가에는 가족 연대가 없는 이유이다. - P169

다시 한 번 가족이 되는 것이다. 백인 좌파 남성은 약골인 적자legitimate son이다. 흑인 남성은 거친 사생아 형제, 권력을 가질 기회를 원하는 서자庶子이다. 배다른 형제들은 타협한다. 즉, 상속권을 박탈당한 형제는 ‘분개하며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로 제멋대로인 신경증적 적자를 돕는데, 술책과 언변에 대한 대가와 무엇보다도 왕좌를 획득할 때 장자상속권의 일부를 양도받는다는 조건이다. 두 형제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정의와 평등이 아니라 (남성의)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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