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량의 [걷는 로봇과 타는 사람] 흥미롭다.
내가 관심있는 장애와 플랫폼이라니.
에피에 실린 글도 찾아봐야겠다.
"문제는 인간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자문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와 사유 그리고 진실은 무엇일 수 있을까?"
미셸 푸코, <말과 사물> - P3
김세영(편집자) - 플랫폼에서 현실감 되찾기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에 따르면 생각은 감각이며, "미심쩍인 것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손쉽게 얻어지는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나도 몰랐던 욕망을 발견하고 흥미로운 생각을 촉발하는 만남을 원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잘 질문하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알고 싶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놀이터‘다. - P13
김리원 - 택배도시에서의 일주일
화요일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주 먼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국가와 도시계획의 의도 아래 매일같이 마주하는 기반 시설인 출근길 인천 송도에서 서울 청량리에 있는 서울시립대까지는 두 시간 30분이 꼬박 걸린다. 아침 6시부터 1호선에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만원전철 안은 격정적인 투쟁의 공간이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손잡이를 동아줄처럼 잡고 있거나, 하차하기 위해 사람들을 헤쳐 나가거나, 앞에 앉은 사람이 혹시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서로를 염탐하는모습 등은 말 그대로 전장 같다. - P26
쉼 없이 운영되는 플랫폼은 [24시간 사회」의 저자 크라이츠먼이 설명하는 ‘24시간 깨어 있는 사회‘를 만든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직장인 여성이 급증하자가족 구조가 변화하며 사회가 24시간 운용되어야 하는시간적 압력이 발생했다고 얘기한다. 자녀를 둔 25~45세의 일하는 여성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다. 이들은 사회와 가정에서 두 번 근무하기 때문에 항상 낮의 제한된 시간에 쫓기고 24시간 운영되는 사회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새벽배송 서비스를 운영하는 마켓컬리의 주 고객층이 30, 40대의 바쁜 여성이라고 하니 크라이츠먼의 설명이 어느 정도 검증된 셈이다. - P29
강미량 - 걷는 로봇과 타는 사람
나는 오랫동안 이 몸짓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몸짓에는 일생의 많은 것이 녹아 있다. 타인과 보폭을 맞출 줄 아는 사람은 혼자 멀찍이 앞서 걷는 사람보다 돌봄 경험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돌봄은 타인에게 시선을 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짓 읽기는 타자와 함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과 함께 움직이는 데 익숙한 사람은 바닥을 살핀다. 바퀴를 움직이기에 너무 무른 지면이나 휠라이로 넘기 힘든 턱이 있는 곳을 피하기 위해서다. 몸짓을 읽다보면그 몸짓이 끝나는 경계선을 마주하기도 한다. 2021년 12월부터 지속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시위는 지하철이 만남의 장소가 아닌 휠체어 타기를 배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 P40
그러나 장애학자와 장애운동가의 반응은 차가웠다. 엑소스켈레톤을 이용해 마비 장애인을 걷게 하려는 시도가 정상과 비정상의 위계를 재생산한다는 비판이었다.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대신 개개인의 몸을 교정하는 방식은 보행의 정상성을 공고히 할 뿐이다. 장애학에서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에 - P42
따른 차별을 비장애중심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기술철학자 애슐리 슈는 신기술을 매개로 비장애중심주의가 강화되는 현상을 ‘테크노에이블리즘’이라 부르며 엑소스켈레톤 로봇을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다. 엑소스켈레톤을 비판한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이 신기술이 걷기에 대한 사회적 선호를 드러낼 뿐 장애인의 실제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로봇은 장애인의 취약한 경제적 상황에 비해 너무 비싸고, 밖에서 자유롭게사용할 수 없으며, 대소변 관리와 통증 완화 등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에서 로봇을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첨단기기의 의학적 효과가 불명확함에도 비장애중심적인 사회의 선호에 따라 걷도록 요구받는 피해자였다. - P43
인류가 네발 보행에서 두발 보행으로 진화하는 그림은 걷기를 강조하는 비장애중심주의적 구조가 과학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리게 했다. 이 무렵에는 걷기에 너무 비판적이었던 나머지 걷는 몸을 가진 사람은 이런 연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할 정도였다. 구체적인 몸짓에서 출발한 연구가 추상적인 이론 속에서 허덕일 즈음 현장 연구가 시작됐다. 2019년 가을이었다. - P45
로봇과 휠체어는 대립하거나 서로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다. 파일럿 대부분은 지금 당장 휠체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봇을 사용하지 않았다. 속도, 안전성, 독립성 면에서 로봇보다 나은 휠체어를 더 친숙한 기술로 여겼다. 로봇을 타면 기껏해야 시속 2킬로미터 남짓으로 걸을 뿐이지만 휠체어로는 서너 배 빠르게 움직일수 있다. 또 로봇을 탈 때는 낙상에 대비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휠체어는 혼자서밀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 파일럿은 로봇은 "보조 도구"이고 휠체어가 "신체의 일부"라고 표현했다. - P49
나는 걷기를 장애 정치의 포기로, 휠체어를 걷기의 포기로 보기를 멈추었을 때 비로소 다양한 움직임을 몸에 축적한 사람들을 만났다. 휠체어를 타다가 로봇에 옮겨 타 걷는 파일럿들이 있듯이, 로봇을 타다가 훨체어로 옮겨 타 춤을 추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었다. 이제는 걷는 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함께 걷기에서 함께 움직이기로 문제가 확장되었다. 내가 만난 독특한 몸짓들은 여전히 연구실이나 병원 같은 한정된공간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과 휠체어와 로봇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단을 낮추고 틈을 메꾸고 적절한 인력을 배치한 공간들. 그러나 이 공간을 나서는 순간, 걷기와 타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사라지고로봇과 휠체어가 멈춘다. 우리가 목도한 지하철 시위는이렇게 멈추게 된 수많은 휠체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플랫폼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손쉽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의 플랫폼은 타는 사 - P51
람들을 이동시키는 데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 걷는 몸에게 열린 플랫폼이 타는 몸에게는 닫혀 있다. 과연 이 플랫폼이 로봇을 탄 몸을 환영할 수 있을까? 같은 시간에 같은 역에서 내리는 승객들처럼, 타는 몸과 걷는 몸이 동시에 오르고 함께 내리는 플랫폼을 상상한다. 이 공동의 몸짓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남은 숙제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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