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 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물론 나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매번 그런 충 - P53

격에 휩싸이며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 - P54

내 경험에서 보면 여성운동(여성학)이 여성학(여성운동)에 대해 - P55

품고 있는 상호 ‘편견‘, ‘선입견‘, ‘오해‘, ‘고정관념‘, ‘불신‘, ‘무시‘, ‘분노‘ 또한 만만치 않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여성운동가(여성학자)가 여성학자(여성운동가)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관념 역시, 남성(사회)이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 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옹호자인 독일 출신의 유대계 여성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P56

지난 2000년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많은 - P58

‘진보 인사들이 "안기부 프락치"라고 비난한 경우나, 유시민 의원이 개혁당 활동 당시 당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여성 당원들에게 "해일이 일고 있는데, 겨우 조개나 줍고 있냐"며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는 사건들이다. 여기서, ‘해일‘은 남성들의 정치, 즉 ‘진정한‘ 정치를 의미하며, ‘조개를 줍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비유한 것이다. 여성 억압은 너무나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다. - P59

이런 사고 밑바닥에는 남성만이 보편적 인간이며 절대 주체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당위가 깔려 있다. 어떤 면에서 부르주아 지식인 남성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좌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력, 남성의 주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상대화해야 하는, 자신을 후원하는 ‘아버지’를 버려야 하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전이인 것이다. - P60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 P61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 P65

이 글에서 나는 분열하는 두 사람이다. 나는 어머니를 타자화하는 ‘명예 남성‘이지만 동시에 어머니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다. 나는 어머니이면서도, 아직도 아버지의 인정을 욕망하는 딸이다. 이 배타적인 정체성 사이를 일상적으로 오가며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순되고 복잡한 감정을 고해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 메시지와 남성 판타지에 대해 쓴다. - P69

도 아니다. ‘해부학이 운명‘이라는 프로이트의 가정은 여성에게만 해당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을 미혼이든 비혼(非婚)이든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사실 ‘생계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하지만 여성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고, 남성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 - P70

기 때문에 여성보다 더 많이 받는다.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 노동자는 노동 시장 진입에서부터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일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 P71

성별 제도로 인한 성역할은 대칭적이지 않다. 남성의 성역할은 남성의 모든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남성은 젠더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성별 제도로 인해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성역할과 노동자·시민·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갈등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남성 중에서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듯이 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안(못) 하는 사람도 있듯이, 모든 여성이 어머니의 의무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전쟁에는 미달하되 전쟁만큼 사망률이 높은 유일한, 위험한 사회 활동일 뿐이다. - P7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 권력 관계의 표지이며 점령지로 간주된다. 남성 정치학의 연대와 계승은 ‘전쟁시‘에는 적군이 소유한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을 통해, ‘평화시‘에는 부계(父系, 夫) 가족을 통해 어머니의 몸을 빌려 작동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정치학이다. 모성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모성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의미한다. - P76

어머니의 노동이 여성에 대한 통제와 착취라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한국이 국방비 지출 세계 10위권 국가이면서도 이 정도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사회 복지 비용을 여성들이 가족 내 - P80

무보수 노동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문화, 미풍양속, 전통으로 합리화한다. 군비 축소·반전반핵·평화 통일운동은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도전과 파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P81

식민 지배와 압축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현대사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한국적 젠더‘를 생산했다. 나약하고 무기력하나 폭력적인 아버지 혹은 그러한 아버지의 부재와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하며 아버지를 뒤에서 티나지 않게 조종하는 ‘지혜로운‘ 어머니상은 서구의 젠더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어머니들은 존경받아 왔다. 이제까지 어머니의 지위는 여성이 거의 유일하게 도달할 수 있는 존경받을 만한 사회적 권력이었다. - P83

누가 나더러 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착한 여자만이 천당 갈 수 있다."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라면, 여성주의는 "나쁜 여자가 천당 간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와 거리가 멀다.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 P89

나혜석과 동시대에 삶을 마감한 화가 이중섭은 말년에 가족과헤어져 정신분열로 자해를 거듭하다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그러나 이중섭의 죽음은 나혜석처럼 ‘시대를 앞서간 자의 비참한말로‘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여겨진다. 나혜석의 삶은 죽음으로 환원되었지만, 이중섭의 죽음은 삶으로 환원된다. 나는 나혜석의 삶이 행복했다고 본다. 그 자신도 그렇게 평가할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시대의 지배 규범에 삶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한 여성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가 되거나 정신병원에서 죽는다는 신화 ‘나혜석 콤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 - P91

또한 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일 뿐이다. 여성들을 겁먹게 하는 것은 나혜석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남성 사회의 해석이다. 대개 ‘위대한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여성의 삶을 전유하고 싶은 남성의 시선, 욕망일 뿐,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살기 위해서,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 P92

이제까지 여성들은 ‘위대한 여성‘의 삶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성이 해준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에게 교육이 허락된 것은5천 년 인류 역사에서, 채 1백 년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갖고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들이 ‘한 명 이상‘ 등장하기시작한 것은 근대 대중 교육이 보급된 이후였다. 오늘날 여성들이 ‘나혜석‘처럼 살기 위해서,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두려움으로 귀착되지 않기 위해서,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을 탈환해 오기 워해서,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 P99

여성에게 (기존) 언어가 없다는 사실은, 이처럼 인식론적 특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 경험과 지배 언어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모든 인식, 특히 새로운 언어는 현실에 의문을 품을 때에만 생성 가능하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드러난 정체성의 정치학은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고, 부르주아 문화의 ‘구별 짓기‘ 행태에 대한 부르디외의 강렬한 인식은그가 노동 계급 출신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의 대표적인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의 동성애 정체성이 그의 근대 주체 비판 이론에 끼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피억압자로서 자신의 삶의 조건을 주류의 형식에 끼워 맞추지 않고, 새로운 세계관을 전개하는 근거로 삼았다. - P102

나는 여성학이 하나의 학문이라기보다 학제(學際)이고, 여성주의는 성별 이슈라기보다 인식론이며, 여성운동은 평등보다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09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구조 중의 하나는,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남자-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2001)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상대방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 P119

70여 년 전 독일 출신의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Karen Horney)는 성공 심리에 대한 남녀 간의 성차를 분석하면서, 여성이 성공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성공에 대한 공포‘라는 말로 표현했다. 유사 이래 인간 관계의 갈등을 조정하고 남성들을 위로하는 보살핌 노동은 여성의 성역할로 간주되었고, 여성들은 ‘바깥일‘을 하면서도 이러한 노동을 묵묵히 견뎌 왔다. 남성의 성공은 사회적으로 지지받지만, 여성의 성공하려는 의지나 권력 추구는 여성성에 대한 위반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격려받지 못한다. 호나이에 따르면, 여성의 성공은 자신의 여성성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공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120

서구에서 혼외의 사랑은 대체로 이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외도‘는 가족에 역기능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도‘는 ‘가정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집 밖 사랑은, ‘자본주의 유지에 봉사하는‘ 가족 제도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가족 이기주의에 별로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순기능적이다. 사람들은 ‘외도‘의 즐거움으로 가족 제도의 고통과 지루함을 견딘다. 한국 남성들의 혼외의 성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성매매의 성격이 강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 P138

여성이나 흑인, 장애인 모두 ‘누군가 ‘찬성‘하지 않아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의 ‘동의‘와 ‘허락‘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139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된다. 그럴수록 여성들은 밤거리나 여행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등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해야 한다. 반대로 국가와 사회를 통치하는 ‘안 걸린‘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보호자, 시혜자, 감시자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것이 ‘화학적 거세‘의 배경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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