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P15
모직 외투의 젖은 끝단이 뻣뻣하게 얼어붙고 나서야 마침내 백이삭은 하숙집을 찾았다. 평양에서 먼 길을 오느라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눈이 많이 내리는 북쪽과 달리 부산의 추위는 기만적이었다. 남쪽의 겨울이 더 따뜻한 것 같았으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약해진 폐에 스며들어 뼛속까지 시렸다. - P31
"그럼, 바쁘고말고!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 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뿐인 기라." - P52
일본인들을 욕할 것도 없다고 했다. 지금이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이기고 있지만 당연히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수는 조선인들끼리 벌이는 다툼질을 그만두면, 언젠가는 일본을 빼앗아서 일본인들에게 훨씬 나쁜 짓을 할 수도있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놓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 P74
숲까지 걸어가는 긴 시간이 짧게 느껴졌고, 숲에 들어서자 바닷가보다도 외진 것 같았다. 나지막한 바위와 드넓은 청록색 바닷물이 펼쳐져 훤히 트여 있는 풍경과 다르게, 거대한 나무들이 두사람의 머리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꼭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캄캄한 거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새소리가 들리자 선자는 고개를 들어 어떤 새인지 둘러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한수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한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 P75
한수가 선자를 향해 움직였다. 한수에게 비누 향과 머릿기름의 노루발풀 냄새가 났다. 깔끔하게 수염을 깎은 잘생긴 남자였다. 얼룩 하나 없는 한수의 옷이 아주 좋았다. 왜 그런 것이 중요했을까? 하숙집 사내들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다 더러워졌고, 아무리 문질러도 윗도리와 바지에서 생선 비린내가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입은 것이나 가진 것은 사람의 마음과 성격이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다. 선자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신선한 숲속 공기와 어우러진 한수의 냄새가 났다. - P77
조 씨의 딸들은 몇 해 전에 혼인했다. 작년에 둘째 사위가 시위를 주도하다가 순사에게 쫓기자 만주로 도망갔다. 그래서 지금 조씨는 사위가 그렇게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이 나라에서 쫓아내려한 부유한 일본인 손님들에게 가장 좋은 곡식을 팔아서 그 훌륭한 애국자 사위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단골 일본인 손님들이 아니었다면 조 씨의 가게는 당장 내일이라도 문을 닫을 것이고 가족은 굶어 죽을 판이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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