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부분이 움직이면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힘과, 방파제에 부서지는 물결의 힘과, 무거운 하늘 아래 수평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조증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느낌에는 어딘지 초월적인게 있었다. 손을 뻗으면 세상을 쥐고 있는 영혼과 접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명료한 자각의 순간과 마주했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란 걸 일순간 깨달았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 P343

그를 보고 재빨리 웃어 보였지만 목울대가 울컥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울지 않으려고 커피를 들고 수선을 떨었다. 크림을 더 섞고 설탕도 더 섞었다. 블랙커피 색이 점차 밝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며칠 전에 간호사가 한 말을 생각했다. 적어도 저 남자 같지는 않잖아요. 어쩌면 간호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아저씨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꼬이는 바람에 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마저 잃었다. 이 나라가 끔찍하다고ㅡ갇힌 기분이라고 정신과 의사에게 말했을 때 나는 몇 년 동안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란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변화를 향한 나의 꿈은 헛되고 무익해 보였다. 미국은 약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기어였지만, 나를 꾸짖은 정신과 의사는 옳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미국을 전연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미국은 이민자가 의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나라였다.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 - P356

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 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 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 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 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P357

"아주 간단해요." 여자가 또 한 번 설명했다. "논문의 승인 페이지를 새 서식으로 작성하고 논문 심사위원회의 서명을 받으면 돼요."
그게 끝이었다. 종이 한 장과 세 명의 서명. 4년 동안 이 문제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였다. 무슨 의례인 양 행정실의 이 여직원을 찾아올 때마다 서명을 받지 못한 채 돌아섰다. 매번 어깨를 으쓱하면서 관심을 꺼버리고는 학위가 뭐 중요하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물론 학위는 매우 중요했다. 학위를 받는 게 그저 두려웠을 뿐이었다. 성공이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고, 내 병이 두려웠고, 내 잠재력이 두려웠고,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게 두려웠다. 젊은 시절 아빠도 학위를 따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재능과 실력이 있었지만 음대 학사 학위까지 몇 학점을 남겨놓고 그만두었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결코 잊지 못한다. 아빠는 학위 받는 게 두려웠던 거야. 아빠는 나를 빚고 만들었다. 나를 세상으로 인도했다. - P386

오랜 시간 우리는 한패인 동시에 동료-한 거푸집에서 만든 두 개의 형상—였지만 나는 아빠가 아니었다. 내가 아빠의 길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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