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

경희는 이 마님 입에서 ‘어서 시집을 가거라. 공부는해서 무엇하니.‘ 꼭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속으로 ‘옳지그럴 줄 알았지.‘ 하였다. 그리고 어제 오셨던 이모님 입에서 나오던 말이며 경희를 보실 때마다 걱정하시는 큰어머니말씀과 모두 일치되는 것을 알았다. 또 작년 여름에듣던 말을 금년 여름에도 듣게 되었다. 경희의 입술 은간질간질하였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고 싶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도 하고 싶었다. - P15

그러나 이야기가 점점 길어 갈수록 그럴 듯하다. 더구나 감독이 왔더란 이름말이며, 존대를 하더란 것이며, 사내도 여간한 군 주사쯤은바랄 수도 없는 월급을 2000냥까지 주겠더란 말을 들을때는 설마 저렇게까지 거짓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난다. 사돈마님은 아직도 참말로는 알고 싶지 않으나 어쩐지김 부인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아니하다. 또 벽에 걸린수(繡)도 확실히 자기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쉴 새 없이바퀴 구르는 재봉틀 소리가 당장 자기 귀에 들린다. 마님마음은 도무지 이상하다. 무슨 큰 실패나 한 것도 같다. 양심은 스스로 자복(服)하였다.(자백하고 복종하였다.) 내가 여학생을 잘못 알아 왔다. 정말 이 집 딸과 같이 계집애도공부를 시켜야겠다. 어서 우리 집에 가서 내외시키던 손녀딸들을 내일부터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꼭 결심을 했다. 눈앞이 아물아물해 오고 귀가 찡한다. 아무 말없이 눈만 껌뻑껌뻑하고 앉았다. 뒤곁으로 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중에는 젊은 웃음소리가 사[사기] 접시를 깨뜨릴만치 재미스럽게 싸여 들어온다. - P22

경희는 불을 때고 시월이는 풀을 젓는다. 위에서는 푸푸, 부글부글하는 소리, 아래에서는 밀짚의 탁탁 튀는소리, 마치 경희가 도쿄음악학교 연주회석에서 듣던 관현악연주 소리 같기도 하다. 또 아궁이 저 속에서 밀짚 끝에불이 댕기며 점점 불빛이 강하게 번지는 동시에 차차아궁이까지 가까워지자, 또 점점 불꽃이 약해져 가는 것은마치 피아노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칠때에 붕붕하던 것이 점점 땡땡하도록 되는 음률과 같아 보인다. 열심히 젓고앉은 시월이는 이러한 재미스러운 것을 모르겠구나 하고 제생각을 하다가 저는 조금이라도 이 묘한 미감(美感)을 느낄줄 아는 것이 얼마큼 행복하다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나저보다 몇십백 배 묘한 미감을 느끼는 자가 있으려니생각할 때에 제 눈을 빼어 버리고도 싶고 제 머리를 뚜드려바치고도 싶다. 뻘건 불꽃이 별안간 파란 빛으로 변한다. 아, 이것도 사람인가, 밥이 아깝다 하였다. 경희는 부지중 "재미도 스럽다" 하였다. - P30

경희의 앞에는 지금 두 길이 있다. 그 길은 희미하지도 않고 또렷한 두 길이다. 한 길은 쌀이 곳간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토요, 가기도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한 길에는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 주어야 겨우 몇 푼 돈이라도얻어 보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뿐이오, 사랑의 맛은꿈에도 맛보지 못할 터이다. 발부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돌을 밟아야 한다. 그 길은 뚝 떨어지는 절벽도 있고날카로운 산정(山頂)도 있다. 물도 건너야 하고 언덕도넘어야 하고 수없이 꼬부라진 길이요, 갈수록 험하고 찾 기어려운 길이다. 경희의 앞에 있는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오늘 택해야만 하고 지금 꼭 정해야 한다. - P42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먼저 하느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하자는 팔이고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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