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니그로(negro)라는 말은 흑인들을 존중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 P63

너무나 많은 흑인들이 스스로를 미스터 찰리(Mr. Charlie)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갔다. 미스터 찰리란 흑인들이 백인을 가리킬 때 쓰던 용어이다. 그들은 백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파크스는 흑인도 어엿한 한 인간이고, 백인과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파크스는 백인들에 대해, 우리가 ‘톰 아저씨 태도‘(Uncle Tom Attitude)라 부르는 흑인 특유의 온순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그런 면이 아주 좋았다. 그는 성격이 좋고, 재미있고,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몇 시간이라도 멈추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파크스는 또한 내가 만나본 최초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NAACP(the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1931년이었고, 마침 스카츠보로 소년 사건(the Scottsboroboys)이 세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실 내게 그 사건에 대해 처음 알려준 사람도 파크스였다. 그는 스카츠보로의 아홉 명의 흑인 소년들에게 기가 막히게 억울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 소년들이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위 - P70

한 재판 비용 모금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등을 말해주었다. 파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이름조차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모든 동료를 래리(Larry)라고 부를 뿐이었다. - P71

1941년, 나는 근처 공군기지인 맥스웰 필드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 기지는 흑백 분리주의를 시행하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모든 군사기지 내 공공장소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주의를 금지하는 명령을 발효시켰기 때문이다. 군사기지 관내를 운행하는 버스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기지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또다시 흑인과 백인이 엄격히 분리된 버스를 타야 했다. 내가 일하던 기지 내 건물에 살던한 백인 여자가 생각난다. 기지 안 버스에서 그녀와 나는 마주보며 앉곤 했다. 그녀는 아홉 살 난 아들과 함께 앉고 나는 로즈라 - P76

는 이름의 동료직원과 맞은편 의자에 함께 앉았다. 우리 셋은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일단 기지를 벗어나시내버스를 갈아탈 때면 그 백인 여자는 앞자리에, 우리는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것을 본 그녀 아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백인 여자는 미시시피 출신이었지만 우리와 나란히 앉아 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 P77

나는 유권자 등록을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등록을 시도한 것은 1943년이었다. 사무소에서는 매일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 등록 업무를 보기 때문에 날짜를 미리 알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기마련이었다. 그들은 언제 유권자 등록 업무를 보는지 미리 공개하지도 않았다. 개인이 전화를 걸어 물어야만 알려주었다. 따져보니 그들은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등록 업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시간에는 대부분의 흑인들이일을 하느라 사무소에 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설혹 짬을 내어 사무소에 간다 하더라도, 그것 - P87

이 곧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그들은 즉시 사무소 문을 닫아버렸다. 아무리많은 사람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이모든 것이 흑인을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사히 사무소 안에 들어가는데 성공해도 등록에 실패하는경우가 많았다. 그 이전에는 재산을 소유한 흑인만 등록을 해주었었다. 내가 등록할 무렵에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문해 시험에통과한 사람만 등록이 허락되었다.
1943년 첫 유권자 등록일에는 내가 직장에 나가야 하는 날이어서 갈 수 없었다. 닉슨 씨와 메디슨 변호사가 그 지역 흑인들에게 날짜를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인지 그날 법원 건물 주변에는흑인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내 어머니와 사촌도 그 안에 있었다. 그 두 사람을 포함한 많은 흑인들이 얼마 후 유권자 등록증을우편으로 배달 받았다. 백인들은 사무소에서 즉시 등록증을 받지만, 흑인들은 나중에 우편으로 받았다. - P88

인두세는 일 년에 1.5달러였고, 모든 등록 유권자들은 반드시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두세를 소급해서 내야 한 사람들은 거의 다 흑인들이었다. 스물한살이면 유권자 등록을 하는 백인들은 그 때부터 매년 1.5달러씩 내면 그만이지만 유권자 등록을 거부당했던 흑인들은 등록 즉시 스물한 살 때부터 소급해서 - P89

적용된 금액을 내야 했다. 1945년, 즉 내가 서른두 살에 등록 유권자가 되었으니 11년 치의 인두세를 한꺼번에 내게 된 것이다. 당시 돈으로 16.5달러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 P90

당시에는 흑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규칙들이 있었다. 일부 운전기사들은 흑인 승객들을 일단 앞문으로 올라와 버스요금을 지불한 뒤 다시 내려가 뒷문으로 승차하도록 요구했다. 요금을 내고 하차한 뒤 뒷문으로 가는 동안 버스가 그냥 떠나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몽고메리 시내버스에는 서른여섯 개의좌석이 있었다. 앞쪽 좌석 열 개는 백인전용 좌석으로, 백인승객이 전혀 없을 때에도 항상 비워두어야 했다. 뒤쪽 좌석 열 개는, 법률에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통상 흑인 좌석으로 간주되었다. 흑인들은 버스 뒤편에 앉도록 요구됐고, 앞쪽에 빈 좌석이있어도 절대로 앉지 못했다. 흑인 좌석이 다 차면 나머지 흑인들은 서서 가야했다. 반면에, 어떤 버스기사들은 백인 좌석이 다 찰경우 흑인들에게 좌석을 백인에게 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가운데 열여섯 개 좌석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는 운전기사들의 재량에 달렸다. 운전기사들은 총을 휴대하고 다녔고, 좌석 배치를 비롯한 버스 내 다른 모든 흑백 분리 규정들을 집행하는데있어서 경찰과 맞먹는 권력을 지녔다. 비교적 너그러운 기사들도 있었고 유난히 성질 고약한 기사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운전 - P91

기사들 모두가 사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흑백분리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였다. 조금 더 아량 있는, 혹은 조금 더 친절한 흑백 분리주의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P92

나는 닉슨 씨 및 조 앤 로빈슨 교수와 함께 클로데트를 만나그녀의 사건을 연방 법원에 제소하자고 했다. 그녀가 동의했다. 소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클로데트의 연설회를 몽고메리 곳곳에서 개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가는가 싶었는데, 클로데트가 임신 상태라는 걸 닉슨 씨가 알아챘다. 클로데트는 미혼이었다. 따라서 소송도 물 건너갔다. 백인언론들이 클로데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그들의 잔칫날이 될 것이 뻔했다. 클로데트를 부도덕한 여자라고 비난할것이고, 그러면 재판에서도 질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패배가 분명한 소송을 위해 더 이상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이지 말고 좀 더 적절한 고소인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P129

모두가 내가 당한 일에 대해 분노했고,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을 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흑백 분리 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다. 설사 일터까지 걸어서 가야 할지라도 두 번 다시 그런 버스를 타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번의 내 사건이 흑백 분리 버스탑승 제도에 대한 테스트 케이스(test case, 판례가 되는 소송사건, 또는 - P143

어떤 법률의 합헌성을 묻는 소송 - 옮긴이)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닉슨 씨가 내 사건을 테스트 케이스로만들면 어떻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어머니와 남편과 상의해보겠다고 말했다. 파크스는 처음에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클로데트 콜빈 사건 당시 다중의 지지를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논의했고또 논쟁했다. 마침내 어머니도 파크스도 닉슨 씨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들도 흑백 분리 버스제도에 반대했고, 그것과 싸울 결심을 굳혔다. 고소인이 없는 한 판결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나는 내가 바로 그 고소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 P144

IN 나는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내 변호인인 찰스 랭포드와 프레드 그레이는 나의 ‘무죄‘를 주장하긴 했지만, 내 혐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었다. 내 사건을 테스트 케이스로 만들기 위해서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그 판결에 대해 상급법원에 항소해야 했다. 오직 상급 법원을 통해서만 분리주의 법들이 폐지될 가능성이 있었다. 지방법원의 판사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흑백 분리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과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벌금 10달러와 재판 비용 4달러도 내야했다. 재판을 지켜본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지만, 조직적인 시위는 없었다. - P157

닉슨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사람들이 서둘러 보이콧을 끝내고자 할까봐 몹시 우려했다. 그는 흑인들을 결집시켜 투쟁하도록 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두려우십니까. 그렇다면 모자와 외투를 걸치고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번 일은 하루 이틀 안에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아주 오래, 지난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저는 말하고 또 말해왔습니다. 제 자식들만큼은 절대로 제가 겪어온 이 숱한 모욕을 겪지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자식들뿐 아니라, 제 스스로도 조금이나마 자유를 누려야겠다고 말입니다." - P162

많은 백인 여자들은 가정부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가정부나 요리사들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데려오고 또 데려갔다. 몽고메리 시장은 그런 행위는 보이콧을 도와주는 격이 되므로 중지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버스 보이콧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바로 백인 여자들이 자신의 가정부들을 출퇴근시켜주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백인 여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시장님이 직접 우리 집에 와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내 아이들을 돌보고, 요리해주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겠어요. 하지만 내 가정부는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 P170

그날 무엇이 나를 그렇게 폭발하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앨라배마 주립대학을 흑백 통합 대학으로 만드느라 애썼던 오서린 루시도 그와 비슷한 신경쇠약을 겪었다는 얘기를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만성 신경쇠약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를일이다. 하지만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졌던 것은 그 때 한 번 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한때는 사람들이 나를 그 버스 사건 한 가지로만 관련시켜 바라보는 것이 꽤 힘들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수많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 P179

뿐만이 아니었다. 게일 시장은 흑인들이 길가에 모여 교회 차량을 기다리는 행위를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모인 흑인들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등 소란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법원은 시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흑인들의 집단 대기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서를 발부했다. 그러나 몽고메리 법원이 그 명령서를 발부한 바로 그날, 연방대법원이 우리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발표했다. 몽고메리의흑백 분리 버스탑승 제도는 위헌이라는 판결이었다.
그날은 1956년 11월 18일이었다. 킹 목사가 대규모 공개회의 - P180

를 열어 우리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모두가 환희의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MIA는 흑인들에게 이제 버스를 타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명령서가 공식적으로 몽고메리 시에 전달되려면 한 달 이상이 더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 P181

1964년 시민권법은 우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흑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호막은 되어주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아직도 쟁취해야 할 권리는 많았고, 시민권 운동도 계속됐다. - P194

1964년의 시민권법과 1965년의 투표권법은 흑인들 및 우리와뜻을 같이 하는 백인 지지자들의 비폭력적 저항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킹 목사는 비폭력주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가 비폭력적 저항을 통해 영국을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것에 대한 많은 책을 읽었다. 간디는 상대가 폭력을 휘두를 때 똑같이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말했다. 킹 목사도 역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흑인들이 분리주의와 싸우면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싸움이 그러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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