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편집 방향이 외국 학자 인용만 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자는 것이라서, ‘세대‘ 호의 「청년팔이의 시대는 제가 쓴 글 중에서 가장 내 목소리로 얘기한다는 느낌이었어요. - P15
문화연구 중에서도 저는 경험 연구를 하는 사람인데요. 박사논문 인터뷰를 시작하기까지가 무척 힘들었어요. ‘해봤자 너무 뻔할 것 같아. 결국 재미없는 얘기만 하고 끝나겠지. 더 우울해지겠지.‘ 하고 지레짐작했고, 너무 준비되지 않아서요. 인터뷰는 또래 세대가 각자 속한 장에 따라 형성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대상자를 정치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 뉴미디어 종사자 세 부류로 설계했는데요. 만나기 전에는 ‘나는 연극을 너무 모르는데…….‘ 이런 상태였다가도 만나고 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이론적인 틀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그냥 느끼는 거예요. 왜 진작 안 했지, 후회하면서도 돌아오면 또다시 원래 상태가 되지만, 그렇더라도 공부하는사람은 인터뷰 참여자나 경험 자료 없이는 나아갈 수가 없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에요. - P21
한국어는 KCI나 영문은 구글스콜라를 통해 인용정보를 타고 타고 읽는 게 좋은 글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KCI가 좋은 건 인용 정보가 다 나온다는 거죠. 지금 읽고 있는 글을 인용한 글을 보여 주니까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글을 인용한 글을 따라가다 보면, 더 최근에 누가 또 좋은 글을 썼는지 만날 수 있어요. 좋은 대부분의 글이 영문이지만요.
- 문화연구자 김선기 - P26
대학원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는 수업 도서를 읽고 어떤 인사이트를 얻었냐는 교수님 질문에 ‘인사이트‘라는 것이 뭔지 되물은 적도 있어요. 그때까지 제가 경험한 공부는 글이든 수식이든 주어진 텍스트를 최대한 잘 이해하는 것이었지, 내 생각이나 의견을 주석처럼 더하는 방식이 아니었거든요. - P46
국내 연구자와의 네트워킹은 잘한 것 같지 않아요. 다만 <에피> 13호에도 글을 써 주신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선생님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글과 SNS로만 알뿐이지만요. 어떤 집단을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면서도 연구자로서 독립적이도록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농촌이라는 현장과 그 현장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견지하면서 ‘먹이고 먹는‘ 생활의 면면을 쓰는 선생님의 관점이 무척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정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직접 뛰어다니며 보고 쓴 것의 힘이 이론적인 연구들보다 더 세다는 것도 절로 느끼게 됩니다. - P48
제가 연구자로서 훈련한 ‘좋은 질문 하는 법‘이 실전 인터뷰에 특히 유용하게 쓰였죠. 이와 관련해 3호 ‘지진‘에 실린 우주인 이소연 박사님의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제가 찾은 기존인터뷰들이 생각보다 우주에서의 몸의 경험과 우주에서 하는 일을 많이 다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인터뷰에서 들은 답변 중 여성 우주인의 생리에 관한 답변이 흥미로웠는데, 처음에는 박사님께서 이 내용을 싣고 싶지 않아 하셨습니다. 여성 우주인들의 몸 경험이 자주 능력의 미달로 여겨져 부당한 비난을 받아 왔기에, 여성적 신체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의견이셨죠. 바로 그 이유로 이 질답이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저는 의미를 더 보완해 박사님을 설득했습니다.
- 과학기술학 연구자 강연실
💜에피 3호 찾아봐야겠다! - P54
저에게 미적 경험은 자아와 세계,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리가 사라지는 경험이에요. 종교적 경험도 그렇고요. 스무 살쯤에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는데, 거기에서는 내가 세계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인간의 물음에 세계가 응답하지 않는 상황을 문제로 설정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과 세계 사이의 그 거대한 벽이 사라지는 특별한 순간이있고, 그게 바로 미적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 P69
저는 이 구절이 울프가 그리려던 것을 그대로 설명하는 말이라고 느꼈어요. 『등대로』가 시적 언어로 더듬는 지속과 영원성의 경험은 결국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시간 밖에서 어두운쐐기로 응집되었다가 빛과 침묵 속에서 경계를 잃고 티끌과 하나 되는, 그런 존재의 순간들이요. 종교학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미적 경험이 종교적 경험과 맞닿아있다는 느낌에서 생긴 것이었고, 종교적 경험을 해명한다면 미적 경험의 본성에 어느 정도 닿을 수 있으리라여겼습니다. - P71
대학 이후의 공부에서는 수용한 지식을 자신의 언어로 구성하여 짜임새를 갖춘 글로 조직해 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에, 읽은 것을 요약 정리하는 일이 중요했어요. 평소 이미지로 사고하고 기억하는 편이라, - P76
도식을 그려 보고 구조를 이해할 때도 많아서 도식화도 많이 사용하고요. 난해한 철학 원전을 많이 접하게 된 이후부터는 낯선 개념들을 우선 숙지하려 하는데요. 맥락에서 떨어진 정의 설명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체적인 문맥 속에 두고 여러 번 읽으면서 의미를 파악합니다. 누구나 할 법한 뻔한 이야기겠지만 그 이상 특별한 방법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 P77
인문사회 계열 대학원은 이공계 대학원처럼 진학을 하면 생계가 해결되는 시스템이 아니고, 10여 년을쏟아부어 박사학위까지 마친다고 해도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저임금 비전임교원 정도이죠. 자신이든 가족이든누군가를 부양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대학원에 오게돼요. 이런 환경에서는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자연히 특정 계급에 편중될 수밖에 없죠. 물론 이건 본업과 작업을 병행하는 모든 분야의 창작자들이 가진 고충이기도하니, 자리만 바꿔서 똑같은 일을 계속 겪고 있는 셈이에요. 아직 작업을 지속하는 학부 동료들은 모두 생계 문제, 최소한 주거 문제가 없던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해요.
- 미학 연구자 남수빈 - P79
거창하게 공부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연구는 시험공부와 달리 출제범위를 내가 정하고 그 범위에서 구멍을 찾아 메우는 과업이에요. 그럼에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접하고 있는 지식의 전체를 구상할 수있어야 하고요. 시험공부와 연구가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공부하는 과정에서 출제범위 자체가 계속 바뀔 수있다는 점이겠습니다. 그걸 잘 의식하는 것도 연구자의 중요한 자질인 것 같고요. - P107
계약을 했으니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법성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공부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듯이 재미있고 하고싶어서 하는 거죠. 내가 공부를 하면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의미도 약하고요. 그런 생각들이 불쑥불쑥 찾아오는데, 위기가 사람을 망가뜨리기 전에 뭔가를 조금씩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민음사와 한 작업도 그 일종이었고요. 공부는 일인가 물어보셨는데, 일로서 하는 것 같아요. 자기연민이나 자기과시로 빠지지 않으면서 직장인이 일하듯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합법적인 사회활동을하고 있다는 의미 부여도 하고요.
- 정치학 연구자 조무원 - P112
지도교수였던 버킹엄 교수는 영국에서 일찍이 문화연구자로 이름을 알린 학자입니다. 「이스트엔더스(East Enders)」라고 1985년 첫 방송한 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한국의 「전원일기」 같은 장수 프로그램이에요. 버킹엄 교수는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 사는 노동자 계층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를계층별로 다르게 해석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같은 메시지라도 미디어를 보는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는 새로운 주장이었죠. 미디어가 폭력적인 메시지를 내보낸 결과 미디어 메시지를 받아들인 수용자가 폭력적으로 변 - P132
한다는 기존의 견해가 아니라요. 가장 큰 영향을 받은버킹엄 교수의 책은 1994년 출간된 Cultural StudiesGoes to School (Taylor&Francis)인데요.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학생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미디어를 어떻게소화하는지를 생생하게 쓴 책입니다. 이런 접근 방식이온라인의 우리 아이들』집필의 토대가 되었죠.
- 미디어 리터러시 연구자 김아미 - P133
『삼국사기』에서 백제와 신라가 죽을 각오로 싸우는 7세기 시절 이야기가 떠오르는데요. 죽죽이라는 사람의 장렬한 최후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름부터 대쪽같이 쪼개져 죽으라는 뜻이라고…………. 집에 있던 위인전들도 기억납니다. 이순신이 어릴 적 병정놀이 하는 일화에서는 나도 이렇게 똑 부러지게 지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할아버지가 사 준 정주영 위인전 속 유조선으로 바닷물 막는 장면에 감탄했군요. - P149
경험을 바탕으로 정착한 방법이라면 역시 길 위에서 읽는 것이죠. 정확히는 출퇴근 열차 안에서. 1호선주안역에서 신도림역까지 30분, 신도림에서 다시 최종 목적지까지 20분 정도 걸리는데요. 이렇게 일상 속에서 꼭 개입되는 시간보다 좋은 읽기용 덩어리 시간이 잘 없죠. 출근해서든, 퇴근해서든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욱 다행인 건 요새 저는 출근 인파를 살짝 피해 앉아 가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로군요. 덕분에 노트북으로 뭔가를 할 수도 있게 되었고요. 이렇게 일하고, 당산철교든 한강철교는 한강 다리를 건널때는 뭔가 보상을 받는 기분입니다. 뭔가 열심히 읽은 다음, 빛나는 아침 윤슬이 반겨 주는 길을 지나 목적지 - P164
로 간다는 것보다 더 큰 호사는 없을 것 같아요. 아, 밤에도 좋죠. 서점에서 신기한 책을 산 다음 돌아가는 열차에서 보는 한강은 책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하기에 좋은 배경입니다. - P165
모든 글은 독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협상이죠. 여전히 실패가많습니다만, 그동안 공부한 덕에 승률이 꽤 올라간 것같다, 더 어려운 협상에도 나설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겠군요. 이런 협상의 장면으로 2022년 가을 포항시청에서 포항 철도를 주제로 했던 강연이 떠오릅니다. 사실 비수도권에서 대중교통, 특히 시내나 광역 대중교통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죠. 승용차 타면 금방인데 왜 그런 걸 타라고 하지? 이런 반응이 돌아옵니다. 하지만포항시 도시 계획과 도시 구조 자체를 아주 구체적으로 짚어 가면서 망 구축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자, 시민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 줬습니다. 실제 공식 도시 계획문서에 모순되는 내용이 떡하니 수록되어 있는 걸 발견한 다음 대안을 짚은 자리였죠. 이런 작업을 도시마다 해낸다면, 시청은 물론 시민들의 마음과 협상하기도 결국 가능해 보였습니다. 대중교통 노선 하나에서 시작해, 납치된 도시를 해방시켜 기후 위기에도 강건하게버티도록 만들 혁명이랄까요. 몽상 이상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 교통•철학 연구자 전현우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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