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노예제 반대 운동과 여성 권익의 탄생

3장. 초기 여성 권익 운동에서의 계급과 인종

프루던스 크랜들
루크리셔 모트
사라 & 안젤리나 그림케 자매
앨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소저너 트루스
프레데릭 더글러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이 멋진 여성들과 남성들!

그녀들의 이야기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있던 노예제 반대 소설은, 노예제와의 전투가 치러지던 정치영역에서 여성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 사고를 고착화시켰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보수적인 내용과 진보적인 호소력 간의 확연한 모순은 저자 개인의 관점에 있는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19세기 여성의 지위에 내재한 모순적인 성질이 반영된 것이었다. - P69

실제로 산업화의 영향으로 가정에서의 여성의 의무가 줄어들수록, ‘여성의 자리는 집’이라는 주장이 더 강경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성의 자리는 언제나 집이었지만, 산업화 이전 시기에는 경제 그 자체가 가정과 그 주변 농토 위주로 꾸려졌다. - P69

그러나 생필품의 제조가 집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여성성 이데올로기가 아내와 어머니를 이상형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노동자로서의 여성은 최소한 경제적 평등을 만끽했지만, 아내로서의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 남편의 시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인간을 보충하기 위한 수동적인 도구로 규정되었다. 백인 주부의 상황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70

노예제 반대 운동은 중간계급 여성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과는 무관한 기준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할 기회를 선사했다. 이런 의미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은 여성들이자신의 구체적인 일(works)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보금자리였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투에서 여성들의정치 참여가 그만큼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전면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가정생활의 짜릿한 대안을 경험하고 있었기때문일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겪는 억압과 어느 정도 닮은데가 있는 억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서 남성우월주의에 맞서는 법을 배웠다. 여성들은 정치 투쟁의 영역에서는, 결혼생활 내부에서는 꿈쩍도 하지않을 것 같았던 성차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싸움을 걸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여성운동에 관한 엘리너 플렉스너(Eleanor Flexner)의 출중한 연구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통해 값진 정치적 경험을 축적했고,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10여 년뒤 여성 권익 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79

1838년에 완결된 사라 그림케의 「성평등에 대한 서한(Letters on the Equality of the Sexes)」에는 미국에서 여성이 저술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분석이 담겼다. 여성에 대한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의 유명한 논문이 출간되기 6년 전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사라는 성불평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가정을 논박했다. - P83

이 두 출중한 자매의 글쓰기와 강의는 여성 노예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다른 많은 여성들에게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 운동의 일부 지도층 남성들은 여성 권익이라는 주제가 노예제 타파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과 소외를 초래할 거라고 주장했다. 앤젤리나 - P83

의 초기 대응은 여성의 권익과 노예제 폐지의 튼튼한 연결 고리에 대한 자매의 이해를 보여준다.

도로에서 걸림돌을 뽑아버리기 전에는 온 힘을 다해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일 수 없다. (…)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로를 우회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지금 당장. (…) 나의 친애하는형제들이여, 어째서 당신들은 강연자인 우리를 상대로 성직자들이 감쪽같이 꾸민 계략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올해 공개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내려놓고 항복한다면내년에는 청원을 할 권리를, 그다음 해에는 글을 쓸 권리를 넘겨줘야 한다. 남성의 발밑에서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게를 되면 여성은 노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P84

그림케 자매는 흑인해방투쟁과 여성해방투쟁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깊게 인식했기 때문에 한쪽의 투쟁이 다른 한쪽보다 절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이데올로기적 함정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 두 대의의 관계가 변증법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림케 자매는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담았던 다른 어떤 여성보다도, 여성 권익 문제를 흑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이들은 여성은 절대 흑인들과 별개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앤젤리나는 1863년 남북전쟁을 지지하는 애국여성대회에서 "나는 니그로와 동일시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니그로가 자신의 권리를 얻기 전까지 여성은 결코 여성의 권리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2장 - P86

세니커폴스 선언은 19세기 중반에 여성의 권리를 분명하게 자각했다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부르주 - P98

아 및 신흥중간계급 여성에게 모순과 좌절과 터무니없는 억압을 가하는 정치, 사회, 가정, 종교의 상황을 겨냥하여 수년간 엉성하게, 때로는 말없이 전개된 도전들이 누적되어 빚어낸 이론이었다. 하지만 백인 중간계급 여성의 딜레마에 대한자각으로 철두철미하게 응집된 세니커폴스 선언은 남부와 북부 모두에 있는 흑인 여성들의 처지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 여성의 곤경 역시 거의 외면했다. 그러니까 세니커폴스 선언은 이 문서의 성안자들이 속한 사회계급 밖에 있는 여성들의 상황은 도외시한 채 여성들의 여건을 분석했던 것이다. - P99

샬럿 우드워드가 세니커폴스 선언에 서명하게 된 동기는더 잘사는 다른 여성들과는 달랐다. 우드워드가 그 대회에 참석했던 건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구하기 위해서였다. 장갑제조공인 우드워드가 하고 있던 노동은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드워드는 집에서 일하며 가정 내 남성들이 합법적으로 통제하는 임금을 받았다. 자신의 노동조건을 설명하면서 우드워드는 자신을 세니커폴스에 오게 만든 반항심을 아래와 같이 드러냈다.

우리 여성들은 침실에 고립된 채로 비밀리에 일을 한다. 돈을 버는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며, 남성만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이론 위에 온 사회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어떤 공동체든 얼마만큼의 여성은 반역의 날개를 퍼덕였다고 믿는다. 미천한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도내 것일 수 없었던 비참한 푼돈을 위해 앉아서 장갑을 꿰맸던 그 모든 시간 동안 내 존재의 모든 섬유들이 침묵 속에서나마 반역에 가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노동하고 싶다. 하지만 내 일을 내가 선택하고 싶고, 내 임금을 내가 받고 싶다. 그것이 내가 태어나면서 내던져진 삶에 저항하는, 내 나름의 반역이었다. - P102

노예제 반대 운동에 가담하는 백인 여성이 북부에서 흑인 소녀에게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내재한 큰 약점을 보여준다. 운동이 반인종주의 의식을 폭넓게 고취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림케 자매 등이 아주 분명하게 비판한 이 심각한 약점은 불행하게도 여성의 권익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 P106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Ain‘t I aWoman?)"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오하이오 애크런에서 열린 여성대회에서 했던 연설의 후렴ㅡ는 19세기 여성운동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슬로건 중 하나다.
소저너 트루스는 분열을 조장하는 남성들이 쏟아내는 적개심 가득한 야유로부터 애크런의 여성 모임을 혈혈단신으로 구해냈다. 모임에 참석했던 여성 가운데 거친 선동가들의 남성우월주의적 주장에 공세적으로 대거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트루스뿐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강력한 연설능력의 보유자였던 소저너 트루스는 여성의 나약함과 참정권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논박 불가능한 논리로 타파했다. 선동가들의 앞잡이는 여자는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물웅덩이도 못 건너고 마차도 못 타는데 투표권을 바라다니 같잖다고 주장했다. 소저너 트루스는 빨려들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자신은 진창 웅덩이를 건너거나 마차에 탈 때 단 한 번도도움을 받아본 적 없다고 지적했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우르릉대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트루스는 말했다. "나를 보라고요! 내 팔뚝을 보라고요!" 그러고는 옷소매를 걷어올려 자기 팔뚝의 ‘엄청난 근력‘을 드러내 보였다. - P108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 P109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구태의연하게 정의를 거역한, 혐오스럽고 비인도적인제도로 여겼지만 북부의 백인 노동자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신분 역시 남부의 노예화된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집단 모두 경제적 착취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처럼 전투적인 인물도 임금노동자의 조직결성권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리버레이터」 창간호에는 정당을 결성하려는 보스턴 노동자들을 규탄하는 기사가 실렸다. - P114

여성 권익 운동의 지도자들은 남부 흑인들의 노예화와, 북부 노동자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시스템을 통해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초기 여성운동에는 백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백인 여성 노동자에 대해서조차도. 많은 여성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지지했지만 노예제 반대 의식을 여성 억압에대한 분석 속에 통합하지는 못했다. - P115

앤젤리나 그림케의 눈부신 「우리의 두 번째 혁명의 장병들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Soldiers of Our Second Rev-olution)」은 앤젤리나의 정치의식이 대다수 당대인보다 훨씬앞서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앤젤리나는 연설에서 노동자, 흑인, 여성을 품어 안는 동맹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급진 이론과실천을 제안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검은 피부의 노동자가 낙인이 찍혀 있는 한 흰 피부의 노동자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앤젤리나 그림케의 명료한 주장처럼 이 시대의 민주적 투쟁―특히 여성 평등을 위한 투쟁-은 흑인해방투쟁과 손을 잡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을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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